4월이 뒤꿈치를 보이며 밀려가는 날 밤. ‘치앙마이에서 내가 좋아한 것들’ 열 가지를 마무리하고 5월을 맞아야겠다며 급히 컴퓨터를 켰다.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우면 정말 우울해질 것 같다... 이러면서 또 하루를 밀렸다.
첫 번째는 지난번에 쓴 ‘나무들’이었고, 오늘은 두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휙휙 써내려가 보자. 사실 순서는 별 의미가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선착순으로 앞자리를 내준 것뿐. 그런데 떠오르는 열 가지가 거의 한 번쯤은 언급했던 거다. 그럴 수밖에 없지. 좋은 걸 만나면 좋다고 떠들 수밖에 없으니까.
2. 아카아마
아카아마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많은 하트를 터뜨리며 홍보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여행자들이 적게 찾는 로컬 주택가에 위치했고 올드시티의 2호점 아카아마가 세련된 감각의 인테리어로 인기를 끌고 있기에, 싼티탐 1호점 아카아마는 낮 시간이 아니면 자리를 골라 앉을 만큼 여유가 있는 편이다. 나처럼 핫 플레이스보다 적당히 한가한 빈티지 취향의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2호점보다 1호점을 선호할 것이다.
약간 허름한 듯해 더 편안하고, 요란하지 않은 아지트 같은 분위기의 카페 싼티탐 아카아마. 무엇보다 매번 의심할 수 없이 맛좋은 카페라떼가 내 눈과 입에서 하트를 터뜨리게 만들곤 했다. 너무나 착하고 귀여운 스태프들은 보너스. 모두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데 순진무구한 웃음이 사랑스러울 지경이었다.
3. Kalm Village Chiangmai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완소 공간이다. 아, 이곳도 홍보대사의 마음으로 극찬의 글을 썼더랬지. 숙소가 가까이 있다면 매일 한 번씩 가고 싶었던 곳이다.
귀국 바로 전 Kalm Village Chiangmai는 어마무시한 더위로 겁에 질린 나에겐 피서지이기도 했다. 적당한 온도의 에어컨 바람 속에 2층 도서관의 마음에 드는 테이블들을 차지한 채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나무가 많은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매트형 쿠션에 누워 잠시 졸기도 하고,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가지고 미치게 예쁜 마당으로 나가 잠깐 앉아 있기도 하고, 카페 옆 식당에서 깔끔하게 세팅돼 나오는 음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하고...
그렇게 종일 보내다가 오후 6시 반 직원들이 퇴근하기 직전 마지못해 나오곤 했던 베스트 플레이스.
4. 29 Coffties
치앙마이의 베지테리언 식당 중 베스트라 장담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베지 식당을 다 가보지 않았어도 음식이 나오는 순간 최고라는 확신이 든다(구글맵의 평점은 압도적으로 높다). 음식이 예술로 보이는 순간이다. 그릇의 모양과 크기, 요리 재료의 색깔, 감각적인 플레이팅이 흠잡을 데 없는 조화를 이룬다. 맛은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속담을 구현한 듯 감탄을 부른다.
주문 받고 요리까지 하는 샤이한 오너 셰프는 푸드 아트에 예술혼을 불어넣느라 그런지 다른 데는 신경을 못 쓰는 것 같다. 손님에겐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다. 계산을 한 뒤 “Thank you for your good food” 하면 눈도 못 마주치고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로 “Thank you so much” 한다. 그게 최고의 친절인 셰프 사장님, 언젠가 또 아트 푸드 먹으러 갈게요.
5. Seven Fountains Jesuit Spirituality Center
천주교 피정 센터 안에 있는 소박한 성당이다. 피정 센터 이름으로 보자면 일곱 개의 분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성당 앞에 동그란 항아리 같은 분수 하나뿐이다.
한국에선 냉담자이면서 타국에 있을 땐 성당을 찾곤 한다. ‘여기선 저 혼자예요. 잘 지켜주세요’ 이런 건가? 어렸을 적 엄마가 나한테 붙여줬던 별명이 생각난다. 국제얌체. 초딩 딸이 먼 훗날 외국에서 얌체 미사를 드릴 걸 예언하셨나. 웃긴다.
여튼 이곳을 좋아했던 건 소박한 성당 주변을 둘러싸고 하늘 끝까지 닿을 듯 거대하고 장엄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이었다. 그 사이를 산책하기 위해 미사를 보러 갔는지도 모르겠다.
6. CAMP
모든 장소를 통틀어 가장 많이 갔던 곳이다. 치앙마이엔 꽤 많은 코워킹스페이스가 있지만 CAMP만큼 편하고 경제적이고 유용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쾌적하다. 마야백화점에서 5층에 ‘거의 공짜’ 공간을, 그것도 꽤 넓게 할애한 건 고마운 일이다. 2000원 이상 주문하면 두 시간 와이파이 이용권을 주지만, 스마트폰 핫스팟으로 데이터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눌러 앉아 공부하고 일할 수 있다.
배고프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어서 와. 오늘은 뭐 먹을래?’ 각종 메뉴를 가진 푸드코트가 기다리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 1층 림삥 슈퍼마켓에서 장을 볼 수도 있고 다른 쇼핑을 할 수도 있다. 백화점 내 우체국에서 친구에게 엽서도 몇 번 보냈다. 1층에선 종종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 애완동물 전시(?)와 판매 등 이벤트가 열린다. 각 층마다 앉아 쉴 수 있는 소파나 다양한 의자가 많이 놓여 있어 손님 친화적이다.
슈퍼마켓 식품 외에 쇼핑을 한 게 없으니 나에게 마야백화점은 CAMP였다.
7. Cafe de Sot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카페와 시각장애인학교가 함께 쓰는, 작은 사원이 있는 울창한 정원에서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자주 갔던 곳. 타닌시장과 같은 방향에 있어 장 보러 가는 길에 들르기도 했고, 카페가 문을 닫은 시간이라도 정원은 열려 있어 어스름한 저녁 산책길에 들어가 연못 가 벤치에 명상하듯 앉았다 오곤 했다. 커피는 정말 맛없는데도 그곳엘 자주 갔다면? 카페가 아니라 정원에 갔던 거지.
8. 나나정글
숲속으로 소풍 가듯 찾아가 초록빛과 초록 향기, 초록 습기에 생기를 얻고, 나나정글에서만 파는 아이템들 구경하며 즐거운 쇼핑을 하고, 음식이나 차를 사다 돗자리 펼치고 버스킹을 즐기는 너무나 행복한 마켓!
9. 예쁜 여자애들과 귀여운 남자애들
뭘 먹고 자란 걸까. 중년 이후의 사람들은 잘 모르겠는데, 외모로 봤을 때 10대나 20대는 우월한 비주얼과 신체 비율을 가진 애들이 흔하다. 44도 아니고 33 사이즈일 듯 가느다란 골격에 키가 크든 작든 긴 팔다리를 가진 여자애들을 1분에 한 명씩은 볼 수 있다. 진짜 작은 얼굴에 평면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않은 이목구비로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애들도 꽤 있었다. (아이유 팬들은 폭발하겠지만) 아이유 급 되는 여자애들을 하루에 열 명은 만날 수 있다. 아니라면 내 눈이 멀었던 걸까.
남자애들은 정말 귀엽다. 말하고 행동하는 게 청년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천진해 보인다. 웃는 모습은 순수 그 자체. 아카아마의 바리스타는 훈남스러운 느낌에 근육 없이 큰 키와 큰 체구인데 아이 같은 목소리와 말투,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까르르 웃는 모습이 ‘나의 이상형을 너무 늦게 찾았구나’ 비극적인 발견을 하기도 했다. 하하.
10. 빠이
빠이는 치앙마이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의 인구 6~7천 명 되는 시골이지만, 치앙마이가 거느리고 있는 곳 같다. 치앙마이에서 2주 이상 머문다면 필수 코스. 빠이에도 장기 체류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히피적으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면 치앙마이가 아니라 빠이가 답이다.
빠이에 도착하자마자 ‘히피들의 천국이구나’ 싶었다. 후줄근한 똥싼바지에 떡진 머리를 틀어올리고 여행자 거리를 배회하는 파란 눈의 남자, 길바닥에 주저앉아 악기를 연주하고 정체불명의 춤을 추는 아시안들(공연을 할 만큼 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들 좋아서 하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길을 맨발로 걸어다니는 사람, 카약을 하고 돌아오는 조그만 트럭에 콩나물처럼 붙어 서서 팔을 흔들며 괴성을 질러대는 요란한 타투의 젊은이들... 처음엔 이상한 세상에 온 것 같았는데 하루도 안 돼 동화되는 내가 신기했다.
개울이라고 해야 할 빠이 강을 경계로 강을 건너기 전은 여행자들이 우글거리는 히피들의 거리, 대나무 다리를 건너면 초록의 전원에서 완벽한 힐링을 선사하는 숙소들이 모여 있다. 그 두 파트 주변으로는 현지인들이 살고 있겠지.
해먹이 걸린 나무 테라스에 대나무로 만든 방이 있는 방갈로 타입의 숙소에 머물렀다. 바로 앞엔 꽃밭과 채소밭이 펼쳐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숙소에만 있어도 평화로 충만해지는 곳이라 풀 부킹이 아니라면 일주일쯤 연장하려 했다.
3박4일 일정으로 숙소를 예약한 나는 그곳에 도착한 날 더 길게 있고 싶어 방이 남아 있는 숙소를 알아보고 다녔으나 어쨌든 그냥 치앙마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밴 안에서 아쉬움을 달랠 길 없었는데, 치앙마이에 와서는 비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온 듯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마약 같은 빠이, 뭐에 한 번 취하면 정신 못 차리는 나는 길게 있다간 그 빠이가 수렁이 될 거다.
치앙마이에서 내가 좋아한 것들은 더 이어갈 수 있지만 여기서 마무리한다. ‘선착순’에서 밀린 것들은 앞의 열 가지와 함께 마음속에 순서 없이 모여 내 기억의 영토에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