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치앙마이에 있어’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했는데, 서두가 또 너무 길어져 오늘도 긴 도입을 한 꼭지로 하여 발행해야겠다. 애초 계획은 ‘치앙마이에서 내가 좋아한 것들 10가지’를 간단히 정리하며 끝내는 것이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무계획은 아닌데 일단 시작하면 계획은 잊고 떠오르는 대로 쓰게 된다.
‘나 지금 치앙마이에 있어’를 마무리해야겠다고 한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곳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치앙마이는 이런데...’ 식의 시큰둥함 때문에 일상에서의 감흥까지도 영향을 받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다. 3개월의 긴 재충전을 하고 왔는데 생활에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방인 같은 심정... 어이없다.
이런 식이다.
사례1.
귀국했을 때 집 옆 천변 산책로에 심어 있던 튤립 구근들이 그사이 부쩍부쩍 자라 색색의 꽃밭이 융단처럼 펼쳐졌다. 너도 나도 사진을 찍느라 바쁜데, 나는 일정한 키의 튤립들이 자기 영역을 1센티미터도 넘지 않고 색깔별로 마스게임을 하듯 일제히 피어난 풍경이 인공적으로 느껴져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판에 박힌 플라스틱 아트 같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구청에서 시들해진 튤립들을 다 갈아엎고 다음 계절에 꽃을 피울 어린 식물을 대량 가져다 심는다. 그리고 그 꽃들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완벽히 사람만을 위한 아웃테리어이고 식물 학대다. 각 계절마다 알아서 꽃을 피우고 떨어뜨리도록 다양한 꽃나무와 다년생 식물들을 심어놓고 계속 잘 자라도록 놔두면 안 되나? 이벤트를 하듯, 축제를 하듯 팡팡 터뜨린 다음 갈아엎어야 하나?
‘치앙마이의 꽃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채, 누구의 다스림도 받지 않은 채, 멋대로 ‘자연’스럽게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는데...’
사례2.
어린이집 옆을 지나치다 멈춰 섰다. 두 남자가 담장 바로 안쪽 나무의 굵은 가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있었다.
“지나가세요.”
한 남자가 말했다.
“그 나무 왜 자르시는 거죠?”
“바람에 나무가 쓰러져서요.”
담장 밖으로 길게 팔을 내민 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좀 늘어졌지만 멀쩡했다. 아니, 작고 여린 나뭇잎을 매단 채 보기 좋은 곡선으로 휘어진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쓰러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
“괜찮은데요? 작은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아요.”
“이제 다 됐습니다.”
“나무 자르지 마세요오~”
“다 끝났습니다.”
왠지 동문서답 같았지만 더 말하지 않고 지나갔다. 어린이집 2층 주민센터에 전화해 그 광경을 얘기했더니 깜짝 놀라며 내려가 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주민센터 직원이 나에게 전화해 말했다.
“밖으로 뻗은 나뭇가지 때문에 방범용 펜스가 휘어 가지를 잘라냈답니다. 어쩔 수 없죠.”
나뭇가지를 자르지 말고 그 부분의 펜스를 바꾸는 쪽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서로 어긋나는 말들을 주고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다 보니 벽돌 담장 위에 설치한 얇은 철봉 펜스가 바깥쪽으로 조금 휘어져 있긴 했다. 하지만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고 펜스 자체가 불필요해 보였다. 담장이 있는데 그 위에 펜스는 또 뭔가.
치앙마이에서는 나무가 집 밖으로 얼마나 가지를 늘어뜨리든 그대로 놔두며, 사람 다니는 비좁은 보도(이런 보도마저도 얼마 없지만)를 다 차지한 채 떡 버티고 선 아름드리나무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사람이 돌아갈지언정 나무엔 손을 대지 않는다. 심지어 나무를 없애지 않고 지붕에 나무가 자랄 구멍을 뚫은 건물도 보았다.
‘치앙마이는 나무에게 무한 자유를 주는데...’
이렇게 툭하면 ‘치앙마이는...’ 하게 되는 이유를 알았다.
마음에 바람이 들어서다.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치앙마이에서 겨울을 넘기고 봄이 되어 돌아올 때 ‘삶의 방식과 방향 전환’이라는 화두를 손에 쥐고 왔다. 주 4일 무위도식하고 놀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최종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게 되려면 뭘 해야 하는가.’
‘뭘 하고 싶은가.’
‘내가 가장 바라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정리되지 않은 여러 생각들 중 열 가지 정도 추린 게 있었고, 그중 하나는 ‘콘크리트 아파트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언제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구상하는 일이 생겼고, 그 일의 타이틀엔 ‘놀이터’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그 놀이터엔 마당이 있고 나무들이 있다. 그 나무들은 미용적 처치를 최소한으로만 받은 ‘자연’스러운 상태여야 한다. 그 다음은 생략.
예전에 한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다 말했다.
“난 죽으면 월계수나무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즈음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가 월계수나무를 처음 보고 감탄했던 터라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 나무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가을, 지인들과 술자리를 끝내고 나와 길을 걷다가 미친 것처럼 가로수 나무들을 하나씩 끌어안고 “사랑해!” 외친 적이 있다. 취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나무들에게 취중진담(고백?)을 했나보다. 그때도 같이 가던 지인이 웃기만 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누구보다’라는 말을 붙이진 않겠다. 단순한 감정으로 좋아하는 나보다 깊은 철학을 가지고 나무를, 숲을,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치앙마이에서 내가 좋아한 것들’의 첫 번째는 ‘나무들’이었다.
나머지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