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고 다 망하는 건 아니다

by 나나꽃

3박4일 춘천에 다녀왔다. 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집중 열일’을 하려고 갔다. 마무리할 작업을 방치한 채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던 차였다.


숙소가 중요했다. 조용히 작업할 수 있는 곳. 큰 건물이 없는 조용한 동네 언덕배기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홈피 사진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만들었다. 게하에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 파스텔톤의 예쁘고 쾌적한 방보다 지붕이 있는 루프탑 공용 공간이 맘에 들었다. 루프탑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오래된 동네 풍경을 내려다보며 일하면 최상일 것 같았다.


꿈을 꾸는 것은 자유다. 현실이 꿈을 배반할 뿐.

특이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가 있고 바깥채는 둘 있었다. 일가족이 써도 될 만큼 꽤 넓고 훌륭한 내부 구조의 안채는 낮은 목재 대문을 열고 들어가게 돼 있었다. 묘하게 집 안에 또 하나의 대문이 있는 셈이었다. 내가 작업하려고 마음먹었던 루프탑 공용 공간은 안채의 대문을 통과해야 올라갈 수 있었다. 안채 손님만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망했다.


바깥채인 내 방 위에도 루프탑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가파른 시멘트 계단 위의 작은 루프탑은 지붕도 없었고, 파라솔 없는 철제 테이블만 달랑 놓여 있었다. 뙤약볕 아래 일하다 일사병으로 119 신세질 일은 없지. 있으나 마나 한 공간이었다.


내가 예약한 방에는 책상이 없었고, 하나 있는 원형 테이블은 방과 연결된 작은 공간에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양 옆도 벽. 난 창문이 없는 걸 견디지 못한다. 테이블을 힘껏 끌어 뒤로 빼니 방 창문이 보였다. 창밖 낮은 지붕들 너머로 ‘OO 모텔’ 간판이 떡하니...


식빵-우유 조식도 제공되지 않는 게스트하우스(루프탑 때문에 감수하려 했지만 이런 게하는 처음이다). 방 안에 주방 시설이 없어 바깥 간이주방에 가야 커피를 내리고 정수기 물을 받아 올 수 있었다. 안채와 똑같은 루프탑만 있어도 모든 걸 눈감아주겠는데, 뭐지? 마치 문간방에 더부살이를 하러 온 것 같았다. 숙박비가 저렴하다면 모르겠지만 작은 호텔보다 비쌌다. 호스트 님, 예쁜 게스트하우스 하시면서 왜 안채 바깥채 차별하나요? 호스트의 주거 공간이 한쪽에 있었지만 그 호스트는 체크인 때 말고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여러 가지로 ‘딥빡’, 빨리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도 억울했다.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갔다. 내가 이러려고 춘천까지 왔나, 한심하여라. 시야가 트이고 전망이 괜찮은 카페, 게다가 커피 맛이 깜짝 놀랄 만큼 맛있어서 단순하게 마음을 풀었다.


일은 3분의 1도 하지 못했다. 카페에 종일 있을 수도 없고, 슬슬 동네가 궁금해지면서 귓가에 들려오는 유혹의 소리를 이겨내지 못했다.

기차까지 타고 왔는데 1일 1곳은 가봐야지~

구글맵 검색!

첫 날은 춘천시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갔다. 타지에 오면 평소 안 하던 일을 해야 뿌듯하지. 춘천문화예술관이 게스트하우스에서 가까웠고 시간이 착 맞았다. 얼치기 클래식 애호가에게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4번>은 익숙지 않았지만 리듬감이 있는 3악장은 좋았다. 인터미션에 공연장을 나왔다. 남아 있는 곡들보다, 종일 굶은 배를 채워줄 음식이 급했다. 난 얼치기 클래식 애호가니깐.






둘째 날은 도담작은도서관에 갔다. 도서관과 관련한 알바(?)를 하고 있어 잠깐 들러볼 생각이었는데, 이 동네에 눌러앉고 싶을 만큼 창의적이고 이용자 친화적인 도서관이라 네 시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노트북 펴고 앉은 자리에서 건너다보이는 집과 골목이 어찌나 서정적이던지... 아예 이 도서관에서 다음날까지 열일을 할까 싶었지만 다음날은 휴관일이었다.









셋째 날은 유서 깊은 죽림동주교좌성당을 거쳐 ‘첫서재’에 가보았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은 소박하나 기품 있었다. 성당 부속건물 카페에서 커다란 나무를 보며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현직 기자가 20개월 휴직을 하고 춘천의 폐가를 사 근사한 공간으로 꾸민 공유서재 첫서재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20개월이 지난 후 여행자들에게 독채로 빌려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기 때문. 가을쯤 며칠 이곳에 머무는 걸 시도해볼까. 이곳에선 ‘집중 열일’이 가능할 것 같다. 첫 서재가 있는 육림고개 주변을 걸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언덕, 그곳에 있는 게 좋았다.






‘집중 열일’에 실패한 걸 생각하면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다독여본다.

몽땅 망한 건 아니지 않니?

휴대폰 카메라에 찍힌 동네 풍경이 ‘그렇다’고 대답해준다.

(춘천 사진을 쭉 보니 게스트하우스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곳에 마음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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