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양아파트 아니고 분양텃밭

by 나나꽃

비구름보다 한 발 빠른 산책길

분양아파트 옆 분양텃밭엔 초록의 生, 命

수없이 들락거린 흙의 손 흙의 발과

최선을 다해 한 계절의 평생을 짓는

오이 마늘 양파 방울토마토 참깨 파 호박……

추문이 끼어들지 않는,

분양아파트 아니고 분양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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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우리 자매가 모이면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일하고 한 사람은 베짱이처럼 놀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 한 사람이 나다.


그런데 일만 하던 두 사람이 소파에 늘어져 있으면 내가 불안해진다. 왠지 공기가 침체된 것 같고 둘 중 누군가 다운돼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분주해야 안정된 느낌이 든다. 이건 무슨 병일까.


주방에서 오이소박이를 만든다, 오징어찌게를 만든다, 부산스럽다가 TV 예능 프로에 눈을 박고 반쯤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부추겨 밖으로 나왔다.

주방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였던 분양텃밭으로 향했다. 실은 이것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이 집이 내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텃밭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내년에 구청에서 텃밭을 분양받아 도시농부 코스프레를 해보려 하고 있기 때문.


“비가 올 거 같아. 빨리 갔다 오자.”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텃밭을 돌며 가장 초록초록하게 생기가 돌았던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엄마가 이름을 모르는 작물이 없었고 생육의 시기와 특징까지 입에서 술술 나왔다. 엄마 뭐야....? 라고 생각하다 보니 엄마도 아주 오래 전 텃밭을 얻어 일 년 동안 농부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친구분이 사는 수색까지 가서 무려 100평의 텃밭을 혼자 가꾸고 저녁에 녹초가 되어 돌아왔던 그때를 까아맣게 잊고 있었군. 엄마는 도시농부를 더 이어가지는 않았다. 다른 욕심은 없는데 일 욕심은 많아 100평이나 얻은 게 문제였지.


“좋다, 좋다.”

“마늘을 뽑아야 하는데 이 집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감자, 고구마 키우는 게 제일 쉽지.”

“저기 오이 매달린 거 봐라.”

“이게 참깨야.”

.

.

“오늘 텃밭 구경 참 잘 했네.”


하하, 내년 왕초보 도시농부를 잘 코치해줄 멘토를 찾았다.

먹구름은 흐지부지 흩어져 멀리 물러가고 있었다.


분양텃밭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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