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젯밤 나는 기진맥진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짐했다.
‘입을 다물고 살자.’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집회 후 광화문까지 행진했을 때의 일 때문이었다.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촛불집회는 일 년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편향적인 언론이 기사화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소규모도 아니고 대규모 집회인데.
어쨌든, 난 거기서 미친 짓을 했다.
(정치적인 내용의 글에 거부감을 갖는 작가님들이 많은 것 같지만, 눈치 보면서 글을 쓰고 싶진 않다. ‘좋아요’를 받으려고 쓰는 게 아니니까.)
토요일 오후면 시청광장과 광화문광장은 늘 행사 중이고, 옆에서 수백 수천 명이 소리를 질러도 잘 안 들릴 만큼 광장 주변까지 엄청난 출력의 음악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촛불집회 참가자로서는 서울시의 의도적인 광장 점령으로 보인다. 광장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일 년 동안 단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토요일마다 시민들이 얼마 참가하지도 않는 행사를 이어갈 수가 있을까? 현 정부는 이전까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던 아고라, 광화문광장과 시청광장을 ‘위험한 집단 촛불시민’들로부터 ‘일반인’들을 구별해 입장 특혜를 주는 곳으로 만들자고 작정한 것일까?
그젯밤 서울시는 행사도 없는 광화문광장에 철제 펜스를 치고 가공할 볼륨의 사이키델릭 음악만 틀어놓은 채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입장을 ‘불허’했다. 촛불집회 참가자는 손에 들고 있는 피켓으로 구분된다. 사회자도 프로그램도 없이, 좀 놀고 싶은 시민들이 입구 건너편에서 파란색 손목띠를 받아 착용한 뒤 안으로 들어가 어둠속에 기계음을 들으며 춤을 추거나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나왔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후지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촛불집회 행진 대열의 종착점이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나는 부계의 반골 기질을 물려받았다. 그런 기질을 드러내면 성가신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학습해왔기에 웬만하면 참고 살지만, 몇 년에 한 번쯤은 유전적 기질이 야생적으로 표출되곤 한다. 주로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피켓을 옆구리에 낀 채 팔목띠를 받아 착용하고 출입구를 무사통과했다. 그리고 입장한 시민들 맨 뒤에서 피켓을 위로 올려들고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소리에 묻혀 좀 늦게야 알았지만, 철제 펜스 밖에서 환호가 들려왔다. 촛불시민들이 펜스에 몸을 기댄 채 나의 ‘금지구역 입장’과 ‘피켓 춤’에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응원에 보답하듯 나는 더 살판 난 듯 춤을 추었다.
곧바로 안전요원인지 보안요원인지 모를 덩치 큰 남자요원들이 나에게 몰려왔다. 나가라고, 그들은 고압적으로 요구했다. “정치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니고, 그냥 춤을 추고 있었을 뿐이고, 그 안의 누구도 나를 의식하지 않는데 누가 내 정치행위에 영향을 받는단 말이지? 게다가 시민의 광장인데 손에 야광봉을 들든 피켓을 들든 왜 개인의 자기표현을 억압하지?
난 개의치 않고 요원들을 피해 돌아다니며 더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들은 서로 팔을 엮어 나를 그들 안에 가두더니 완력으로 밀치며 토끼몰이하듯 출입구로 몰고 갔다. 펜스 밖에서 "왜 못 놀게 하느냐"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버티며 밀쳐져 나가는데, 여자요원이 오더니 내 피켓을 빼앗아 분노한 표정으로 박박 찢었다. 거구 남자 세 명은 쉽게 나를 펜스 밖으로 내쫓았다. 가만 놔두었으면 춤추다 그냥 나갔을 텐데, 그들은 왜 불필요하게 과잉된 업무 수행을 하는가, 납득할 수 없었다.
반골 기질은 더 발동되어 나는 마침내 입구 밖에서 ‘정치적’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펜스 밖이었기 때문에 요원들이 제재를 하지는 못했다. 10분쯤 그랬을까. 나는 완력으로 나를 내쫓은 남자요원들과 내 피켓을 찢은 여자요원에게 사과하기를 요구했고, 사과를 받으면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현명한 여성이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요원들에게 안으로 입장하는 방법을 묻고 편안한 말투로 몇 마디 말을 붙인 다음 질문을 했다. 이 춤판은 매일 열리는지(요원은 주말에만 열린다고 했다), 언제까지 하는지(요원은 모른다고 했다) 등등. 그러고는 “이분(나)이 사과를 받으면 간다고 하니 사과를 하시라...” 달래듯 얘기했다. 우물쭈물하던 요원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한 명 한 명 나에게 사과를 했다. 두 명의 ‘연대’가 이뤄낸 일이었지만, 그 여성의 융통성 있는 방식이 마음을 움직인 것이기도 했다.
사과를 받은 후 그분에게 감사하고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왠지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다. 난 왜 수월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자 튀는가. 광장에 ‘들어갈 수 있는 시민’과 ‘들어갈 수 없는 시민’으로 갈라치기를 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하지만 굳이 입장 띠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서 춤을 추어야만 했을까. 제3자가 되어 그때의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바라보니 가관이었다. 흑역사를 썼구나.
맥주를 사가지고 집에 와 유튜브와 영화를 보면서 좀 기운을 얻었다.
아일랜드 출신 가수 시너드 오코너의 일생을 20분 정도로 축약한 영상을 보며 감정 이입이 돼 눈물이 났다. 록음악을 주로 듣던 나의 청색시대에 그녀의 <Nothing Compares 2 U>와 몇몇 곡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로 인해 가톨릭 교화시설에 들어가 비참한 청소년기를 보내다 그곳 음악교사의 눈에 띄어 마침내 가수로 성공했고, 타고난 반골 기질로 부조리한 사회와 종교에 저항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공연 전 미국 국가 연주를 하는 뉴저지 공연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바로 공연을 했다가 애국자들로부터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공격을 받았던 일이나, 가톨릭계의 아동 성추행 사건 은폐를 비난하는 뜻으로 밥 말리의 <War>의 ‘인종차별’이라는 가사를 ‘아동학대’로 바꿔 부른 뒤 교황의 사진을 찢어버리며 “진짜 적과 싸우자”라며 퇴장해버린 일, 보수적인 그래미가 랩 부문 시상을 사전 행사로 치른 것에 반발하는 힙합 뮤지션들을 대변해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로고를 삭발한 머리에 그리고 나와 퍼포먼스를 한 일 등은 나를 빠져들게 만들었다.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몰랐는데, 지난 7월 26일 그녀는 56세를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왓챠에서 본 영화 <작은 아씨들>은 자신의 강한 기질과 그로 인한 외로움을 눈물로 토로하는 둘째 딸 조에게 엄마가 해주는 말만 적어야겠다.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나는 나의 천성이 고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주 조금은 그렇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굽히기엔 너무 드높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주 조금은 그렇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결론은 나 자신의 행위를 자책하며 역으로 스스로를 억압하지 말자는 것. 하지만 좀 더 현명해지자는 것. 나의 시간을 불필하게 좀먹는 유튜브와 OTT가 쭈그려 있는 나를 다독여줄 줄이야. 뭐든 잘 선택해 소비하면 도움이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