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을 탐독하는 맥가이버

by 나나꽃

오래된 TV를 버리고 복고풍의 클래식한 TV를 장만했다. 상아색 프레임과 수동 채널 다이얼, 양쪽에 달린 V자형 다리까지, 아날로그 감성의 이 작은 TV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가전제품 대리점에서 나는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구입 의사를 밝혔다. 다른 TV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막상 TV가 배달되고 나니 막막했다. 다리를 조립해야 하는데 집집마다 하나씩은 다 있는 십자드라이버가 없었다. 리모컨만 누를 줄 아는 기계치라 몇 개씩이나 되는 잭을 어디에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는 당연히 몰랐다. 되는 대로 해보았지만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엔 파상의 물결만 정신없이 아른거렸다. 어떻게든 다리만이라도 연결해보자. 기사를 부른다 해도 TV는 세워놓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아파트 시설관리를 하는 아저씨께 연락해 사정을 얘기하고, 십자드라이버를 빌릴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예전에 세면대 관이 막혀 관리사무소에 문의했다가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아저씨는 근처에 있다며 곧 들르겠다고 하셨다. 커다란 공구통을 들고 나타난 아저씨는 TV가 어디 있냐며 안으로 들어오셨다. 십자드라이버를 빌려주러 온 게 아니라 조립을 해주러 오신 거였다.


TV 다리는 1분 만에 조립되었다. 방을 돋보이게 하는 비주얼에 ‘잘 샀다’ 생각하며 아저씨에게 음료수를 대령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음료수 잔을 옆에다 놓고는 잭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기사를 부를 거라고 말했지만 잠깐이면 된다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일반 TV와 구조가 다른지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화면은 재생되지 않았다. 바쁘실 테니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내 말은 듣지도 못한 채 TV에만 집중했다. 나중엔 매뉴얼까지 펼쳐들고 탐독하듯 읽었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넘어 있었다. 종일 아파트를 돌며 일을 했는지 아저씨에게서 시큼한 땀내가 났다.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아저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분이었나? 평소 아저씨에 대해 가졌던 인상이 한 순간에 바뀌고 있었다. 아저씨는 늘 때 탄 작업복 차림에 반백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고, 말까지 어눌해 어쩌다 관리사무소 직원 대신 단지 내 알림 방송을 할 때는 뭔가 실수를 할까봐 불안하기도 한,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날의 아저씨는 자기가 하는 일에 백 퍼센트를 다하는 나이스한 남자였다.


마침내 복고풍 TV는 선명한 화면을 선보였고, 아저씨는 얼굴 가득 뿌듯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마시고 가셨다. 아저씨가 더 멋져 보였던 것은 며칠 지나서였다. 집을 나서다 아파트 현관에서 마주쳤는데,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TV에만 몰두하느라 TV 주인은 보지 못한 거였다. 아, 멋지다. 사람에게서 신선함을 느끼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땅엔 겉만 번드르르한 허세가가 얼마나 많은가. 뻔뻔함과 탐욕, 권력욕을 무기로 사람에게 사람 아닌 짓을 하는 리더와 고위층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갑’들이 주는 지독한 피로감 때문인지, 눈에 띄지 않는 이들이 주는 작은 감동들은 더욱 청량하고 짜릿하게 다가온다. 희망은 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 구석구석에 있는 것 같다.


* 요즘 집중하는 일이 있어 브런치에 들어와보지 못했다. 오래 글을 업로드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친절한 알림을 보기 전에, 언젠가 썼던 글을 찾아 올린다. 부지런히 글을 쓰는 작가님들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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