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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안녕하세요, 임승훈입니다

      

저는 종종 글쓰기를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대상에 빗대어 설명하는 걸 좋아합니다. 서랍 정리라든지, 이케아 가구 조립이라든지, 축구라든지. 그중 가장 좋아하는 비유는 요리입니다. 대충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생전 처음 김치찌개를 조리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 여러분의 머리에 떠오른 첫 번째 단계는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해 보는 걸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그 이전 단계가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우린 이런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망각한 수행. 그것은 바로 김치찌개를 먹어보는 겁니다. 당연하겠죠. 김치찌개엔 애초에 레시피만으론 기록될 수 없는 입체적인 정보들이 있으니까요. 그 정보들은 우리가 김치찌개를 직접 먹어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김치찌개가 그 정도인가? 라고 의문을 가지신다면,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카우사 레예나’라는 음식을 아시나요? 페루 전통 요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카우사 레예나를 검색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레시피를 입수하는 건 어렵지 않죠. 하지만 만약 제가 그 요리를 레시피대로 조리한 후 식탁 위에 올려 놓았을 때, 저는 그 음식을 카우사 레예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러긴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전 카우사 레예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먹어본 적이 없으니 카우사 레예나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죠. 저는 이 기준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내부에 기준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은 발전적 실천에 돌입할 수 있는 거니까요. 

기준을 사회에서 규정한 표준으로써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기준도 중요할 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분야든 표준 모델은 다양하고 다종 합니다. 우린 나에게 맞는 모델이 무엇인지 고민해야만 합니다. 어쩌면 나를 나 자신보다 잘 아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걸 가르쳐 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자신에 대해 타인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나요? 아무리 나도 날 모르겠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만큼 ‘나’를 아는 사람도, 나만큼 ‘나’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없지 않나요? 아니 딱 잘라 말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린 이 기준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노력의 일환이 저는 해당 분야의 모델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대다수의 인간은 설계도만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없어요. 애초에 건축 설계도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선 건축물에서 살아봐야 하는 겁니다. 즉, 레시피를 이해하기 위해선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지난하게 비유로 우회해 온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글쓰기를 대하는 입장이 이와 유사하기 때문이에요. 글쓰기를 잘하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봐야 합니다. 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치가 공유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건 어쩌면 지극히 한국적인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글을 쓴다는 행위를 무척 존중해 줍니다. 이건 제가 작가로 살면서 느낀 거예요. 다른 예술 업종 동료들보다 고마운 대접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적 맥락하에서 작동하는 컨텐츠 생산자로서의 작가보다, 사회적 실천자로서의 작가가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이 박혀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적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글쓰기가 있다고 치부하게 된다면, 그때부터 중요해지는 건 ‘글’ 그 자체보다는 ‘왜 글쓰기를 하는가?’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초점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작가에 맞춰지게 될 것입니다. 이걸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 보면 이해가 쉬울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한국 사회에서의 작가는 ‘세계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사회 속의 시민’의 입장이 더 중요하다는 경향이 있다고요(물론 실제 한국 문학사는 더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전개되었지만요). 그래서 존중받는 게 아닐까요? 다른 예술인들에 비해 이 사회에 더 밀접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사’로 인식되어 있었으니까요. 

전 그런 입장도 인정합니다. 어쨌든 글은 그저 도구니까요. 하지만 이때 발생하는 어떤 현상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의 지적인 수행’으로 글쓰기를 인식하게 되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분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나은 시민이 되어야 하며 더 지적인 사유를 누적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말하자면 좋은 글이라는 건 무르익은 석류가 껍질이 터져 알갱이가 세상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자기 수양 끝에 저절로 도달하는 인간적 경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좋은 사람이 되면 글이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지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글이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요? 이미 이렇게 길게 서술했으니 충분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눈치채셨겠지요. 그건 간단합니다. 좋은 글을 많이 읽으면 됩니다. 

이상한 글이죠? 언뜻 순환 논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좋은 글은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읽어라? 그러면 대체 좋은 글은 무언데? 이건 설명이 쉽진 않지만, 조금 거칠게 말해 보겠습니다.

문자 매체적 장단점과 활용법을 명확하게 숙지한 채, 해당 글의 목적을 합목적적이고 효율적으로 구현한 것. 

어쩐지 새삼스러운 정의는 아니죠? 사실 글을 제외한 세상 모든 재화는 이런 기준하에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기술적 노력을 기울이죠. 그렇습니다. 저는 글을 도구이자,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상 모든 것처럼 글 역시 잘 다루기 위한 기술이 존재하는 것 또한 팩트입니다. 

기술이 개입했다는 걸 깨달으면 당연히 그 기술을 잘 다루는 숙련공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됩니다. 프로 기술자들이죠. 다만 이쯤 되면, 아무래도 해당 분야의 내외부는 정보비대칭 현상이 발생하고 맙니다. 즉, 비전문가들은 전문가들의 기술을 나노 단위까지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정밀함을 판단하기 용이하지 않다는 거죠.  

이제 저는 서촌그책방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운이 좋아 이번 책의 원고들을 미리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중 낯익은 분들도 몇 분 계셨어요. 그들은 작년에 제가 서촌그책방에서 글쓰기 교실을 할 때 수강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선연합니다. 참 즐거운 반년이었어요. 

제가 그 수업을 인상깊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니 전술한 것처럼 즐겁다 기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아마 누군가를 가르쳐본 본들이라면 금세 납득할만한 경험을 했기 때문인데요. 그 경험은 이겁니다. 

내가 착하면 착, 내가 척하면 척

하고 수강생들이 잘 알아듣고 따라와 줬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실력이 매일매일 눈에 띄게 성장했다는 것. 

그게 좋았습니다. 당연하면 당연한 거지만, 아무리 돈 때문에 일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누군가의 성장에 일조한다는 기분이 들 때면 형언하기 힘든 보람을 느낍니다. 

그 시기 전 총 일곱 개의 반을 지도했는데요. 하나의 클래스를 한 달 간격으로 운영한 것이었습니다. 

첫 모임 수강생들부터 성장세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이건 뭐 어제 다르고 어제 다르다란 말이 이렇게까지 들어맞을 수가 없더군요. 이전에는 체감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6년간 많은 창작 강의를 이끌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는 글쓰기 강의를 둘러싼 사건과 현상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때의 풍경들은 또 새로웠습니다. 

그땐 그렇지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벌어질 수도 있는 어떤 우연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일이란 몇 가지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면 종종 놀라운 하모니를 선보이기도 하는 거니까요. 

기존에 제가 지도하던 수업들은 주로 ‘소설 창작’이었습니다. 소설 쓰기 교실의 경우 아무래도 시간 관계상 한 학기에 한 편의 소설을 제출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제가 서촌그책방에서 이끈 모임에서 쓰는 글은 A4 2-3매 정도의 에세이였습니다. 덕분에 매주 글을 한 편씩 제출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 수업에 비해 에세이 수업에서는 자주 글을 쓰고 피드백을 주고받게 되어 이런 성장이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 내에 경험하는 총량이 많아지는 거니까요. 

하지만 새로 모집한 다음 클래스와 수업을 하고, 또 다른 클래스와 수업을 하고 하다 보니까, 수강생들이 하나같이 감을 쉽게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커리큘럼이 종료될 즈음엔 맛깔나는 글을 한 편 이상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건 왜 그런 걸까요? 일단 살펴볼 건, 제 글쓰기 수업에 들어오시는 분들의 90%가 서촌그책방 독서 모임 회원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현상은 서촌그책방이라는 공간 혹은 커뮤니티의 특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의 전개상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쉽게 유추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상기의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수강생들이 ‘좋은 글’을 ‘많이’그리고 ‘깊이’ 상시로 읽어온 경험이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삼 년간의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글쓰기 교실만이 아닙니다. 서촌그책방의 운영 방법론도 꽤 주목할 만해요. 

저는 작가가 되기 전부터 여러 독서 커뮤니티를 지켜봤습니다. 제가 직접 참여한 적도 있고요.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독서 커뮤니티가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또한 그것에 어떤 이해관계가 얽히면 ‘책 선정’이 보통 어려워지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함께 읽고 얘기하기 좋은 책만을 정하는 걸로 끝이 아닙니다. 모임장의 지성, 구성원들의 지성과 열정, 경제적 손익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독서 커뮤니티들은 현재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인, 쉽게 읽히는 책을 무작정 선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촌그책방은, 잘 아시다시피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저는 독서 모임엔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꽤 어려운 책을 선정하더라도 언제나 굉장한 밀도로 토론이 이뤄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물었어요.

“아니 그런데, 다들 안 지친대요? 실제로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요?”

그러자 수강생분이 모임장 그러니까 사장님이 노련하게 모임을 이끈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의견을 내도록 유도하고, 분위기가 중구난방이면 적절한 타이밍에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하는 등. 그래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영 토론이 풀리지 않으면 핵심을 짚어주면서 사유를 촉진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가지만 집어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이번 원고 말인데요. 정말 좋은 글이 많았습니다. 그중 몇 편의 글은 글솜씨도 글솜씨지만 기획이 돋보였어요. 이를테면 수빈 씨와 혜수 씨 두 명의 친구가 함께 경험한 어느 한 장면을 두고 쓴 글이라든지, 고한솔 씨가 책방 일일지기 일지로 쓴 글이라든지. 저는 그때마다 

“아니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작가와 글이 찰떡궁합인데요?”

라고 감탄했는데요. 그러면 그분들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였어요.

“원래는 이번에 글을 안 내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이렇게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시더라고요.”

“혹시 이전에 이런 형식으로 글 써본 적이 있어요? 그걸 사장님이 본 건가요?”

“아니요. 저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이런 형식은 처음이고요.”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이 주제, 이 형식이 작가와 잘 맞을지 그렇게 잘 파악하는 거죠?”

“글쎄요? 신기하죠?”

“그러니까요.”

생각해보면, 좋은 글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좋은 글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엔 정보가 차고 넘치니까요. 구글에서 몇 번만 검색하면 좋은 책 리스크가 주르륵 뜨거든요. 참 어려운 건, 좋은 글을 읽도록 만드는 일이고, 더 나아가 좋은 글을 읽는 걸 즐거워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뜻밖의 결론에 와닿게 되는데요. 좋은 글을 읽게 하기 위해선 인간적인 유도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준 높은 독서 커뮤니티를 운영하기 위해선 ‘책 리스트’가 아니라 커뮤니티를 섬세하게 이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각 구성원들이 어떤 감각으로 이 세계와 접해있는지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거죠. 사실 독서라는 게 현대 사회의 모든 활동 중에서 일견 가장 비효율적이면서도 가장 능동적인 태도를 요구하거든요. 다른 매체들은 수동적인 상태에서도 정보가 우리의 뇌로 들어오는데, 독서는 문자를 읽어낸다는 그 피곤한 과정을 직접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이 귀찮은 일을 지속적으로 하게 만든다? 그것도 4년간? 그것도 이 인원을?

그러니까 저는 그 토양 위에서 글쓰기 수업을 했던 겁니다. 글이 길어졌으니 작년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어떤 고양감이나 보람을 더 서술하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꽤 즐거웠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책의 원고들은 서촌그책방의 지난 몇 년을 기념하기 위해 독서 커뮤니티 회원들이 손수 써 내려간 일종의 미시 역사입니다. 우리 한 번 책을 묶어보자란 기치 아래에 순식간에 이 정도 분량의 글 편이 모였다는 게 어찌 보면 제가 구구절절 쓴 내용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동네의 작은 서점이라는 건, 보편적인 자영업과는 다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작은 서점 사장님들은 경제적인 메리트는커녕, 자기 재산을 깎아먹으며 그저 좋아서 유지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내가 사랑하는 서점이 다음 해가 되면 문을 닫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들 지난 20년간 수도 없이 겪었잖아요. 

서촌그책방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떤 파도가 밀려올지 알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아니, 그러므로 

저는 서촌에 있는 이 한 칸짜리 한옥의 작은 서점이 걸어온 지난 시간들에 감탄하고,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좋았습니다. 지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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