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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책을 대하는 가장 친밀한 태도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탓에, 매체 속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에 눈과 귀를 좀 더 예민하게 기울이는 편이다. 한 시절을 휩쓰는 유행어는 대개 신조어지만 기존의 단어가 어떤 계기로 갑자기 불쑥 주목받을 때도 있다. 요즘 내 눈에 자주 띄는 단어는 바로 '태도', 혹은 영어로 attitude이다.  얼마 전 서촌 그 책방 독서모임 때 내가 입에 올린 단어이기도 하다. 아마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토론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태도라는 단어를 활용해서 이런 문장을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어 두었다. 

'진실은 하나의 태도다.' 


내겐 2022년 올해의 도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그 책을 읽고 머릿속에 남은 문장이었다. 진실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공통 진리가 아니라, 대상 또는 사건을 대하는 개개인의 신념과 인생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매우 상대적이면서도 나약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 내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순간, 늘 그렇듯 인자하고 너그러운 책방 선생님(정확히는 사장님이지만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선호한다.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이 다!)께서는 과연! 하는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칭찬에 약하고 어리석은 자아를 가진 나로서 고백하자면 그 순간 약간 우쭐한 기분이었다. 별것 아닌 깨달음을 제법 그럴싸한 문장으로 정리해내다니! 잘했어 나 자신! 역시 이 맛에 독서모임 온다 아닙니까? 잠깐의 오두방정이 머리를 훑고 갔다. 그날 '태도'라는 단어는 그렇게 나의 알량한 자존감을 채우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단어는 자연발생적으로 떠오른 게 아니었다. 사실 그날 단어를 꺼내는 순간에도, 내가 태도라는 단어를 사용한 방식에서 어딘가 모를 묘한 기시감이 들었던 걸 인정한다. (이제 와서?) 그리고 물론 그 이유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최근 인터넷에서 각종 기사와 사설, 혹은 TV광고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 단어는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래, '태도'는 2022년 현재 많은 사람과 브랜드들이 사랑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내가 목격한 활용방식은 주로 이렇다. 고급 시계 브랜드의 슬로건으로 'elegance is an attitude'라는 문장에 쓰이거나, 역시 고급 자동차 브랜드에서 'future is an attitude'라는 문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광고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내한한 유명 래퍼의 공연에 대한 평론에서 한 음악평론가는 '랩은 장르가 아닌 하나의 태도'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심심찮게 마주친 '태도 '는 브랜드가 표방하는 가치나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기에 아주 편리하고도 멋스러운 단어였다. 


물성적인 것인 것과 반대되는, 거의 모든 정서적인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것으로, 그 야말로 요즘 ‘열일’하는 핫한 단어이기도 했다. 태도라는 말이 주는 어떤 ‘거룩한’ 어감은 나만 느낀 것도, 내가 먼저 느낀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그만 김이 팍 새고 말았다. 이를 깨달은 순간부터 태도는 더 이상 나의 단어가 아니었다. 직업적으로도 레드오션이 된 단어이고, 나의 자존감을 채우는 데 사용하기에도 신선도가 떨어졌으니, 이제 자발적으로 태도를 입에 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건만. 서촌 그 책방과 독서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또 그 단어가 떠오른다. 그냥 떠오 르는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설명이 곤란한 느낌이다. 그래서 이 기회를 빌려 마지막으로 태도라는 단어를 활용해볼까 한다. 


하루, 아니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는가, 하는 물음에 숫자 1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빈곤한 나날들이 있었다. 서촌 그 책방을 만나 독서모임을 시작하기 직전인 2018년 초엔 더욱 그랬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육아 노동과 산후우울증에 심신이 다 지쳐있는 시절이었다. 그저 하루를 적당히 흘려보내기 위해 아기와 남편과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 작은 한옥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촌 그 책방을 마주치고 홀리듯 들어간 게 시작이었다. 책방 선생님의 온화한 인상과 조곤조곤한 유혹에 곧바로 설득되어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그 당시의 내게 그 결정은 고민되는 선택지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지푸라기 같은 절박함이었다. 육아가 아닌 뭐라도 하자. 부모님의 다툼으로 집안 분위기가 안 좋거나 마음이 불안할 때면 책을 펴고 골몰하던 습관이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정신적으로 도망칠 행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엇이든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편인 내게 그 결정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후의 뒷감당은 또 다른 얘기였다. 책을 읽는 것 까지는 익숙한 행위지만 한 번 읽은 책에 대해 입에 올 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읽은 책이 좋았으면 "좋았다" 별로였으면 "별로였다"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독서모임이라는 낯선 행위는 책을 대하는 너무나 수고스럽고 부지런한 '태도'처럼 여겨졌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글로 감상평이나 한두 줄 남기면 그만이지 굳이 남 앞에서 무슨 할 말을, 그것도 두 시간씩이나 주고받을 게 있을까 싶었다. 읽은 책 중에 내가 그토록 정성스러운 태도를 취했던 책이 있었나?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드는 지정 문학도서나, 교양수업 활용 교재로 쓰인 책 외에는 없는 경험임이 분명했다. 

 

걱정이 앞선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일단 볼펜과 책갈피 스티커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할 말이 떠오르는 문장을 만나면 그 부분에 줄을 치거나, 줄을 치기에 너무 많은 부분이 인상적이다 싶으면 스티커로 그 페이지를 표시해 두는 것. 이 방법은 독서모임을 시작한 초반엔 매우 유용한 듯 느껴졌으나, 책을 펼치려 할 때마다 볼펜과 스티커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바꿔 말하면 이런 도구가 없을 땐 책을 펼치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독서를 방해하는 역효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류의 말도 안 되게 자잘한 이유를 끌어모아 놓고 '일이 바빠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퉁치며 독서모임을 못 나가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할 말을 표시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책은 일단 펼치는 게 가장 어렵다'라는 만고의 진리와 같은 그 문 장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부터 볼펜이나 스티커가 없이도 책을 펼치고 싶을 때 그냥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독서모임 가서 할 말은... 없으면 듣기만 하지 뭐. 그리 마음먹고 나니 부담감도 한결 사라졌다. 책에 대해 너무나 적극적인 '태도'처럼 느껴졌던 그간의 독서와 모임이라는 행위가 그제야 조금 편안해진 것이다. 의외로 아주 작은 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결심이 필요했던 큰 활동이 제법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의 독서모임에서 할 말이 없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내 입은 빈번히 열렸다. 앞에 '독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한들 수다의 본질은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이다. 참가하는 사람이 여럿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것. 줄을 치지 않아도, 페이지를 표시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 야기를 시작하면 내가 읽었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이어가고 싶은 말들이 생각났다.  


책 한 권에 대한 이야기로 도대체 두 시간을 어떻게 채우나 하는 의문이 그렇게 풀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다들은 책에만 갇히지 않았다. 다양한 나이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책이라는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해 한 발짝 떨어진 곳에 갔다가 아주 멀리 뻗어나가기도 했다. 너무 멀리 가서 길을 잃었나 싶은 순간에는 여지없이 대화 주제를 책 가까이로 끌어당겨 주는 책방 선 생님의 역할이 빛나곤 했다. 그렇게 말을 이어가고 귀를 기울이다 보면 두 시간은 대개 너무 짧았다. 세 시간을 훌쩍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달에 한 번 오는 그 시간이 그렇게 편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내게 독서모임의 정의는 조금 바뀌었다. 책에 대한 너무나 수고스럽고 부지런한 태도에서 책을 대하는 가장 '친밀한 태도' 말이다. 그냥 눈으로 읽고 머리로 삼키고 말았던 독서에 대한 감상을 입을 통해 바깥으로 꺼내 놓는 일. 하지만 그것이 부담으로 여겨지지 않는. 다만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 앞에서 나를 편하게 꺼내어 놓는, 일종의 애정 어린 행위를 추가한 독서. 그렇게 내가 읽은 책이 나와 더 친밀해지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과도 친해지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독서모임 하며 처음 꺼냈던 말을 독서모임을 정의하는 데 활용함으로써 나는 그렇게 태도라는 단어 하나를 열고 닫았다. 내가 느꼈던 단어의 신선함은 사라졌지만, 독서모임이라는 형태로 4년째 이어가고 있는 책에 대한 친밀한 태도는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쭉 이어갈 예정이다. 


물론 독서모임을 한다고 해서 모든 책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책방 선생님이 선정한 책 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땐 반항하는 학생의 심정으로 날 선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장기 독서모임 회원인 나에겐 일종의 일탈인 셈인데 그건 또 그것대로 즐겁다. 와르르 쏟아내는 비판의 말들을 선생님께서 흥미롭게 받아 주시기 때문이다.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독서모임 회원이 “사실 저도…” 하며 수줍게 동조해 주기도 한다. 드러낸  적대감이 오히려 동지의식으로 탈바꿈하는 묘한 모임.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독서모임을 고민하고 있다면 일단 그냥 시작해 보길 추천한다. 책과 친밀해지는 데는 의외로 어떤 재능도 필요하지 않다. 옆에서 도란도란 친밀함을 부추겨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새로운 수다 상대를 나는 늘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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