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Aug 03. 2022
<그림과 그림자>. 김혜리, 안그라픽스
출간된 지 꽤 되었는데, 여전히 책방 추천 목록에 당당히 올라있는 책이다. 한때 씨네 21 독자여서 김혜리 작가의 평론을 잣대 삼아 영화를 선택하곤 했다. 당시 작가는 배우들을 인터뷰하는 코너를 연재했는데, 그걸 묶어 <그녀에게 말하다>는 책을 만들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책 속의 배우들은 말이 일목요연하고 출연한 영화 속 역할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가끔 신작 홍보회의 배우들을 볼라치면 하나마나한 말이 난무해서 굳이 저런 걸 왜 하나?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책 속의 그들은 정말 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유가 뭘까? 전적으로 저자의 준비된 질문과 문장 덕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한국의 문장가 3인 중 한 명으로 김혜리를 꼽는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나는 독서와 영화 그리고 그림 보기를 좋아한다. 당연히 그림도 책으로 배웠는데, 관련 분야 책을 자주 읽다 보니 한국 저자의 책에서 몇 가지 단점이 보였다. 어느 책이나 비슷한 그림이 등장하고, 저자의 해석은 거의 없고 약력이나 기행 소개를 일삼거나, 이미 연구된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뇌거나, 동서양 미술을 두루 다루는 저자는 더욱 드물었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문제는 번역투의 문장을 남발해 읽을수록 난해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림과 그림자>는 우선 선정된 작품에서 차별성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작가와 작품이 태반이었고, 다른 저자의 책에서 본 그림도 저자만의 감상 서술이 흥미로왔다.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 그녀의 책을 종종 들여다보곤 했는데, 차츰 나만의 감상평을 만드느라 골똘하는 내가 보였다. 책이 미친 영향이었다. 영화판에서 갈고닦은 문장에 저자의 오랜 취미인 그림 보는 안목을 담았으니, 책이 좋을 수밖에. 독서는 알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림 보는 시야를 넓혀준 길잡이 책이 되었다.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조르조 모란디라는 이탈리아 화가가 있다. 화풍이 당시 유행한 인상파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독자적인 데다 소재도 독특했다. 도자기 병 몇몇 개를 늘어놓은 그림이었는데 조용하고 우수에 젖은 모습이 박물관 진열장 속 우리 청자와 묘하게 닮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시나 책에서도 보지 못한 화가인데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첫 대면은 7년 전쯤 뉴욕의 MOMA에서 이루어졌다. 화려한 기획에 어쩌다 낀 소품이었는데 내 눈엔 모란디만 보였다. 화면으로만 애정 하던 스타를 만나니 어찌나 반가웠던지. 오래 작품 앞을 서성이며 팬심을 마구 드러냈다. 이렇게 마주하다니 참 좋네요, 중얼거리며.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에서 모란디 전시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마치 이산가족 상봉한 듯했다. 만나는 친구마다 붙잡고 그의 전시를 보러 가야 한다고 했고, 전시해설을 해달라는 부탁을 또 거절 못해 꽤 여러 번 덕수궁미술관을 들락거렸다. 팬데믹에 막혔던 해외여행 길이 열리면, 나의 첫 여행지는 이탈리아 볼로냐가 될 것이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볼로냐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쳤단다. 그의 집과 미술관과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을 느긋하게 돌아보며 감상해야지. 일상이었던 여행이 이젠 꿈이 된 현실이라니.
이외에도 세한도와 몇몇 한국 작가의 작품, 뷔야르의 브라운에 대한 언급과 미국 근대 작가의 작품도 다루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미술 전문가의 글의 아니어서 너무 강요하지 않으니, 저자와 천천히 산보하듯 읽기 좋다. 미술 애호가들에게 종종 이 책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잘 모른다. 나의 열띤 설명에 영업당해 책을 구입한 고객이 꽤 된다. 또 놀랍기로는 책을 읽고 난 많은 분들의 반응이다. 다시 와서 꼭 책 감상을 들려준다는 것과 친구에게 선물한다며 재구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칭찬 릴레이가 주는 기쁨이라니, 내가 책방을 차린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