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Hochiminh)에서 여행의 끝을
여행을 한 지 240일, 유럽에 온 지는 88일이 되었다. 무비자로 유럽의 쉥겐 협약 국가를 여행할 수 있는 90일에서 이틀을 덜 채우고 다른 대륙으로 떠난다. 오늘은 바르셀로나에서 호치민으로 떠나는 날이다.
그간의 여행을 짧게 돌이켜 본다. 처음 퇴사 후 향한 미얀마와 태국에서 4개월은 유유자적하게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다. 하지만 유럽까지 와서 한가롭게 있을 수는 없었다. 나의 첫 유럽 여행이기도 했고, 내가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 여행하자는 작은 포부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3개월 머무르며, 건축 답사를 위해 열 곳이 넘는 도시를 돌아다녔다. 알바로 시자, 소토 드 모라, 라파엘 모네오,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그리고 가우디…. 현대 건축가들의 건축을 따라 매일 운동화를 고쳐 신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답사는 나만의 여행을 그려가고 있다는 뿌듯함을 선사했다. 건축가 황철호의 말처럼 미지의 세계로 떠난 다는 감각은 나에게 생기와 기쁨을 주었다.
답사와 여행은 첫걸음이 중요하다.
떠나지 않는 자는 결국 미지의 세계로 가지 못한다.
하지만 도시를 짧은 주기로 자주 옮기고 하루를 꽉 채워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내 성향에 맞지 않았다. 유럽에 있는 기간 동안 글도 거의 쓰지 못했다. 답사가 즐거움이 아닌 부담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날도 종종 찾아왔다. 길고 긴 건축 기행이 모두 끝나고 난 지금, 어설펐던 내 답사의 문제를 안다. 답사 장소 그 자체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중요한데, 나는 충분한 사전 공부 없이 도시 이동과 명소 방문에 급급했다. 가고 싶은 건축가의 답사 루트는 짰지만, 그 건축가와 장소, 맥락에 대한 공부는 당일이나 이동 시간에 간신히 하는 허술한 수준에 그쳤다. 그 탓에 정작 건축물을 보면서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갈수록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스페인에서 건축 답사가 끝나갈 때쯤, 나는 여백이 많아 구멍이 숭숭 뚫린 동남아에서의 시간들이 절실했다.
어머니는 일정을 꼼꼼하게 짜는 타입이었다. 그렇게 꼼꼼하게 짜두면 답답하지 않나 싶기도 하겠지만, 실은 오히려 느긋해졌다. 덕분에 우리가 장소 그 자체에만 놀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서두르진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든 다시 돌아올 사람처럼 여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다 보려고 안달하기 쉬운데 그러면 오히려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다.
- 앤드류 솔로몬, <경험 수집가의 여행>
나에게는 3일 만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여행이 아닌, 한 달간 같은 숙소에서 빈둥댈 수 있는 그런 여행이 필요했다. 그렇게 베트남 호치민으로 가는 편도 티켓을 끊었다. 호치민은 작년 8월부터 시작하는 나의 긴 여행의 마지막 도시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목표는 하나다. 매일 쓰는 것. 그리고 이 여행을 잘 마무리하는 것.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설렘도 잠시, 이동할 생각을 하면 피로감이 닥쳐온다. 비행 당일만큼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피곤한 날이 없다. 가만히 앉아 비행기를 타면 그만이지만, 그런 평온한 비행을 위해 많은 투두 리스트를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장기 여행자들은 편도 비행기로 여행하는 탓에 항상 하는 아웃 티켓과 입국심사 걱정을 하고, 짐이 많은 탓에 캐리어 정리와 수화물 추가도 매번 번거롭게 느껴진다. 새로운 도시의 숙소나 유심, 교통편 마련 등 미리 체크해야 할 것들도 많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차일피일 미루다 마지막에 몰아쳐서 처리한다. 한번 이동할 때 온 기력을 소진하니, 다음 이동할 때까지 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막판에야 문제를 발견하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스트레스에 빠진 채로 공항버스를 타는 것은 내 여행의 고질병이다.
이번에는 베트남 비자가 문제였다. 한국 여권으로는 베트남에 무비자로 15일간 거주할 수 있고, 그 이상 체류 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최대 30일 거주할 수 있는 관광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도착 비자와 전자 비자 두 가지가 있다. 미얀마에 갈 때 편리하고 빠르게 전자비자를 발급받은 나는 이번에도 전자비자 신청을 했다. 인터넷에서 3일이면 나온다는 글을 본 탓에, 베트남 항공편을 끊어놓고도 한 달간 비자 발급을 안 하다가 베트남에 가기 일주일 전 신청했다. 그런데, 비행 당일까지도 비자 승인이 나지 않았다.
베트남은 무비자 입국 시, 입국심사에서 베트남에서 제3 국으로 나가는 아웃 티켓을 필수로 요구한다. 나는 급하게 익스피디아에서 24시간 내 무료 취소가 가능한 항공권을 구매했다. 이 티켓을 저장한 후 바로 항공권을 취소하고, 저장한 티켓은 숙소 근처 인쇄소에서 출력했다. 뒤늦게 짐을 싸고 숙소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으니 벌써 오후 3시였다.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날은 간단하게 시내 구경을 할까 했던 나의 계획은 물 건너갔다.
그나저나, 여행을 할 때마다 이 '출력'이라는 것은 언제까지 나를 귀찮게 할까? 모바일 QR 코드로 바로 체크인 가능한 항공사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항공사와 공항에서는 항공권과 비자를 인쇄본으로 요구한다. 일의 절차가 국가마다 다르고 출력본이 확실하다지만, 굳이 꼭 인쇄본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 모바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고, 모바일 기기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여권과 항공편만 있으면 전산으로 확인이 가능할 텐데. 나는 여행의 대부분을 에어비앤비에 묵으니까 호텔처럼 바로 프린터 할 곳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동 때마다 인쇄 가능한 곳을 알아보는 것이 이쯤 되니 꽤 귀찮다. 입국 심사도 바코드로 하는 판에 고객들에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인쇄물 출력을 요구"하는 것은 어쩐지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회사 다닐 때 스마트 보고라고 부르고 인쇄본을 출력하던 비효율이 슬쩍 떠오르기도 하고.
리코에서 출시한 핸디 프린트 영상.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프린터 컨셉이다. 트위터에서 보고 항공권 인쇄하기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으나, 항공권 인쇄를 위해 프린터를 들고 다니는 것이야말로 제일 번잡스럽다고...
어쨌든 오늘도 찝찝한 기분으로 바르셀로나 공항에 가는 A1 버스를 탔다. 게이트까지 찾고 나서는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해서는 탑승을 기다리며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경건히 술을 마시며 탑승 후에 바로 뻗어버리는 것은 나의 유일한 비행 노하우다. 이번에는 이스탄불에서 한 번 경유하는 터키 항공을 이용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이스탄불까지는 3시간, 이스탄불에서 호치민까지는 11시간 걸리느라 두 번째 비행이 유독 힘들었다. 야간 비행에 식사를 하느라 멀미가 생기기도 했고, 늦은 체크인으로 정 가운데 좌석에 앉은 탓에 화장실 가기도 힘들었다.
불편한 비행을 할 때면 나란 사람은 언제쯤 퍼스트 클래스를 타게 될지 궁금해진다. 비행이라는 시간을 잠깐 고통스럽게 때우는 시간이 아닌, 나를 위해 두 세배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할 날이 올까? 내 여행의 시급을 더 쳐주는 날이 올까? 지금 당장은 돈 몇 푼에 할 수 있는 것을 셈하고 있지만, 언젠가 나도 내 안온함에 더 큰돈을 치를 여유를 가지게 될 수 있을까?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밤을 새워 야간 기차를 타고, 빵 한 조각에 하루를 버티고, 만 원짜리 도미토리에 열댓 명이 묵으며 수다를 떨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젊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내가 나의 개성이라고 생각했던 여행의 특징은 단지 젊은 날의 보편성이라는 말. 몇 년 후 내가 어떤 여행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행에 좀 더 돈을 쓸 수 있는 경제력이 더 생기면 좋겠다. 어쩌면 비행에 돈을 쓰는 것은 경제력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겠지만.
그렇게 16시간이 지나고, 베트남 호치민에 도착했다. 페이크 티켓이긴 하지만 아웃 티켓이 있어 입국심사는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오랜 시간을 끌었다. 익스피디아에서 뽑은 아웃 티켓에 항공편명이 적혀있지 않아 심사관이 추가 정보를 요구한 탓이다. (페이크 아웃 티켓 만드시는 분들은 편명 기입되어 있는지 확인하시라..)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 닥친 나는 망했다는 생각을 하며 이미 취소 환불을 마친 항공편의 정보를 찾으려 메일을 초조히 뒤졌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전자 비자가 기적같이 승인되었다. 검사관은 이걸 왜 지금 보여주냐며 눈동자를 굴리더니만,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장을 찍어줬다. 아, 쫄렸다.
도착해서는 미리 찾아둔 정보대로 유로를 환전하고 한 달간 쓸 유심을 샀다. 수속을 다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6시였는데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스페인은 8시에도 해가 지지 않았는데. 도로로 나와 한 번 길게 숨을 삼켰다. 덥고 습한 공기가 콧속으로 흠뻑 들어왔다. 동남아에 도착한 게 실감이 났다. 5개월 전이 생각났다. 이 축축하고 더운 도시에서 아무 부담도 없이 하루하루를 느긋하게 보내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캐리어를 던지고 도시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곧 공항버스를 타고 베트남 1군에 내렸다. 1군은 관광객들이 많이 있는 번화가다. 이 곳의 에어비앤비를 한 달간 빌렸다. 도착한 건물은 생각보다 더 낡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래도 실내에 들어와 에어컨을 트니 살 것 같았다. 근처 한인마트에서 산 맥주와 컵라면을 먹으니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다. 나는 벌써 이 도시가 좋다!
그렇게 호치민에서의 시간이 일주일 흘렀다. 며칠간 호치민이 익숙해질 정도로 생활 반경과 루틴을 구축했다. 대낮에는 보통 집안에 있고, 뜨거운 대지의 열기가 한풀 식을 때쯤 밖으로 나간다. 그 사이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가 내 귀에 축축이 가라앉는 것에 익숙해졌고, 베트남 드리핑 기계로 커피를 내리고 연유를 섞어 쑤어다 제조도 잘하게 되었다. 하루에 두 번 이상 물을 끼얹는 샤워도, 오밤중에 불을 켤 때 나타나는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나 화장실에 상시 거주하는 도마뱀, 내 침대를 기어 다니는 개미도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우쿨렐레를 다시 시작했다. 책상 위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어설프게 4개의 줄을 튕기며 노래를 한다. 스페인에서 사 온 노트도 개시했다. 아무래도 노트에 적힌 이 문구가 내 마지막 도시의 목표가 될 것 같다. Write, don’t talk.
내가 아는 한,
휴가를 마치고 일상에 막
복귀하려는 순간의 인간보다
야들야들한 생명체는 없다.
-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 이 여행도 약 한 달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이동을 생각하면 복잡한 감정이 돌아가는 선풍기 팬처럼 머릿속을 휘젓는다. 가기 싫다. 가고 싶다. 기대된다. 초조하다... 이 여행에도 끝이 있겠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후덥지근한 호치민의 뜨거운 여름 속에서 오늘의 계획이나 짜면 그만이다. 한 달 후 계란찜처럼 야들야들한 상태로 마지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도록.
ps. 여행기가 아주 많이 밀렸다. 타임라인에 퇴사와 공채 이야기밖에 없는 게 슬프다 ㅜ 차근차근 하나씩 올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