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을 탈탈 털자
돌이켜 보면 퇴사 후 삶에 대한 낙관으로만 가득 차 있던 시기는 퇴사 직후였다. 이때 나는 여행을 준비하고, 책도 만들고, 그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우쿨렐레 레슨도 받고, 드로잉 수업도 받았다. 당시 아이폰 앨범을 들춰보면 그렇게 반짝거릴 수가 없다. (실제로 반짝거리는 곳에 자주 갔다)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만 사용하던 그때 나는 '이 행복이 얼마나 갈까'라는 걱정을 했다. 행복하긴 하지만, 곧 끝날 잠깐의 낙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퇴사한 지 200일이 다 되어가는 지금, 하하하 매일 재밌습니다! 꿀잼!
긴 여행의 첫 번째 도시였던 미얀마 양곤은 여러모로 많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나는 이 도시를 생각하면 뜻밖에도 방탄소년단의 노래 'IDOL'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내가 미얀마에 도착한 지 3일 후, 방탄소년단은 IDOL로 컴백했다. 나는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는 양곤의 좁은 숙소에서 그나마 잘 터지는 곳을 찾아 노트북을 들고 컴백 무대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IDOL의 후렴구만 들어도 양곤의 축축하고 덥고 무너질 것 같이 황량한 영국식 건물들이 떠오른다. 유캔 스탑 미 러빙 마셆~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돌이켜 보면'이라는 접두어가 많다는 것이다. 옛 사진을 보다가 혹은 과거의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건 이미 모든 여행기에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식상하다고 안 할 수 없다. 추억팔이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시간이 남아도는 여행자가 밤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는 환각 버섯으로 만든 홍차와 마들렌을 먹고, 과거에 들었던 음악을 LP로 들으며 과거 여행을 떠나는 마르셀이 나온다. 영화의 모티브는 물론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소설에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래서 향기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는 일을 '프루스트 효과'라고도 한다. 여행자에겐 향수를 자극하는 홍차와 마들렌이 사방에 있다.
회상은 그만하고 오늘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나는 꽤 현재 지향적인 나날을 보낸다. 멘탈이 강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최대 3개월)"고 한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미래는 3월, 그러니까 한 달 정도다. 다들 길게 여행하면 돌아와서 어떻게 적응할지, 돈 버는 게 불안하진 않은지 물어본다. 불안하지만, 당장 한 달 후의 계획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먼 미래에 대한 큰 걱정은 없다. 당장 다음 주에 포르투갈 근교에 갈지 마드리드에 갈지도 못 정했다. 물론 나는 2019년의 계획을 A4 용지 4장 정도로 정리해둔 게 있긴 하지만… 그걸 맨날 읽으면서 오늘도 아무것도 안했구나 자기혐오에 빠지기는 하지만… 애니웨이. 아직 연초의 느낌이 가시지 않는 2월이다. 그래도 여름에 이 긴 여행이 끝난다는 것은 아쉽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나만 있을 수 있는 시간, 방해받지 않는 긴 시간'을 10년 내에 또 가질 수 있을까.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큰 성과다. 오늘 임경선 작가는 트위터에 나답게 살기란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삶의 큰 축인 일과 인간관계가 본래의 나와 엇나가지 않아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에 휩쓸리지 않고 실력/노력을 쌓는 게 힘들고(일), 갈등하고 실망시키고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경우가 많기(인간관계)" 때문이란다. 지금 내가 나답다고 느끼는 감각은 일과 인간관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시적 감각이다. '한시적 곰돌이 푸 상태'랄까요.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왜냐면 나를 빡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시적이라고 해서 슬프기만 하진 않다. 이 느슨하고 황량한 여행 동안 나는 충분히 나다웠고 조금씩 변했다.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조용한 여정 이후, 다시 일과 인간관계로 뛰어들지언정 전처럼 힘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 여행을 떠나는 날, 은사님이 말씀하셨다. 너만의 '자유'롭고 긴 여행을 응원한다며 신영복의 책 한 구절을 적어주셨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을 거라며.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담론> 중에서
안타깝게도, 자유롭게 여행한다는 것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무언가 하는 날보다 생각에 빠지는 날이 더 많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날엔 남들과 비교하거나 자괴감에 빠진다. 왜 나는 이 정도밖에 못할까… 그럴 때는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just do it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열등감과 자기혐오는 진화론적으로 필요한 본능이라고 생각해왔다. 장강명 작가 역시 자기혐오 자체에 순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 감정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잦은 질투와 현타는 진화론적으로 긍정적이다.
서른이 가까워지기까지, 나는 매번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계획을 세우는 고질적인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초, 중, 고, 대,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그 날의 투두 리스트를 다 지운 날이 3일 이상 지속된 적이 없다. 적지 않게 공부를 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써도 그런다. 애초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양과 질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내가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매일 나에게 실망을 한다. 그럴 땐 내가 만든 작은 성과를 들춰 나를 자꾸 칭찬해야 한다.
아무리 매일 실망해도 가끔 내가 뿌듯한 날이 있다. 이를테면 많은 시간과 공부를 통해 꾸역꾸역 미뤄온 글 한 편을 쓴 날이다. 이런 뿌듯한 날은 며칠간 나를 버티게 해 준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나의 사소한 성과를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매일 자기혐오에 빠지고, 일기장엔 우울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이걸 해결할 방법도 안다. 내가 책에 썼던 나의 말을 인용하자면.
“일상의 작은 행복에 집중하고, 꾸준함의 힘을 믿고, 자기 자신과 가장 친해지기”
결국 답은 언제나 같다. 꾸준하기. 나의 작은 성과를 차근차근히 쌓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