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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y 23. 2019

당신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나요?

나만의 시그니처 질문


얼마 전 스페인 여행을 할 때 마드리드의 한 식당에서 한국인 여성분과 우연히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이라던 그분은 마드리드에 잠시 출장을 왔다고 했다. 매일 혼자 먹느라 심심하던 차에,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테이블 바 의자를 당겨 앉아 상그리아와 이베리코 스테이크를 먹었다. 어느 미술관을 다녀왔는지,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는 와중, 그분은 나에게 낯선 질문을 하나 던졌다.  


"OO 씨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요?"


첫 만남에 이런 질문을 하시다니요! 하고 바들바들거리니 그분의 답변은 이러했다. “저는 요즘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겠어서,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녀요." 이 질문을 듣고 나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잠시 숨을 고르고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는 머릿속을 뒤적거리며 단어와 문장을 조각조각 찾아 그분에게 날 것 그대로를 늘어놓았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내게 행복한 삶은, 경계를 무너트리는 삶이다. 내 안의 경계, 나와 타인과의 경계, 마이너리티의 경계….


처음 질문을 받고는 당황했지만, 이후에는 이 질문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의 부적응 ⇢ 퇴사 ⇢ 여행'이라는 퇴사자 정석 루트를 거치며 생에 있어 자아성찰을 가장 많이 하던 때였다. 혼자 있을 때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도 '행복'과 '늙음'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런 주제는 친한 사람과 있을 때 쉽게 꺼내기 힘들어서 타인과 대화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 분과는 다시 만날 사이가 아니었기에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의 학벌, 직장, 연봉, 집, 가족.. 이런 삶의 세속적인 프로필을 모르는 사람과는 불필요한 정보는 생략하고 이상적인 관념에만 집중할 수 있다. 적절한 답변을 생각하기 위해 정리하고 발화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도 정리되어갔다. 그렇게 각자의 행복론에 대해 나누다, 그분의 랩에 내 학교 선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서로 초면에 이런 오글거린 대화한 것은 비밀로 지키자며 웃으며 헤어졌다.




나는 매년

수백 개의 질문을 받는다


"당신의 행복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은 지워나갈 투두 리스트가 꽉 찬 현실의 삶에서는 뜬구름 같은 소리나 오글거리는 소리로 치부받고는 한다. 나 역시 현생에 치여 내면에 대한 질문을 잊고 살지만, 본격적인 자아 진단을 할 기회가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종단연구의 참여 대상인 덕분이다.

 

종단연구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조사하여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 방법이다. 대표적인 사례인 '하버드대학교 성인발달연구'는 하버드생 268명을 1937년부터 지금까지 추적해 성인의 발달과 성장에 관한 최장기 전향적 종단연구로 꼽힌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는 이 연구를 모델로 삼아 한국인에게 권장할만한 행복의 비결을 탐색하는 SNU행복종단연구를 2010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50년 이상 지속되는 이 연구는 참가자들에게 1-2년 간격으로 연락해 설문을 진행하며 참가자 개개인의 인생 여러 영역의 방대한 지표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나에게는 잊을 때쯤이면 한 해를 반추하는 자가 질문 키트가 50년 동안 주어진 셈이다.


하버드 성인발달연구는 일반화할 수 없는 집단을 대상으로 하긴 하지만, 끈질기고 방대한 접근을 통해 행복의 조건에 대한 훌륭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준다. 연구자 조지 베일런트는 책 《행복의 조건》 통해 기나긴 성인발달연구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인적 사례를 샅샅이 파헤친다. 책에 따르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화를 예견하는 주요한 행복의 조건으로는 일곱 가지가 있다.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이 그것이다. 50대에 이르러 그중 5,6가지 조건을 충족했던 하버드 졸업생 106명 중 절반은 80세에도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였다. 반면 50세에 세 가지 미만의 조건을 갖추었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 연구의 목적은 단순히 성공과 실패한 삶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행복한 사람의 삶을 추적하며 행복한 삶의 비결을 찾고, 공통의 요소를 찾아 공동체의 행복을 만들어나가는데 있다.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행복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설계하는 것도 용이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시대가 변화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진화하며 끊임없이 변한다. 하버드대학교와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의 종단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연구자들이 죽기 전까지 행복의 조건을 추적하며 시대와 개인에게 필요한 행복의 이력을 추적할 것이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도 행복연구센터에서 메일이 오면 벌써 이렇게 한 해가 지났음을 알아차린다. 두 시간 넘게 행복과 성격 변인에 대한 수백 개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게 맞는지 현타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가 진단은 잠시 복잡한 삶에서 멀리 떨어져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진단하는 효과적인 툴이자 인터미션이 되어준다.


하지만 진단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나 잘 살고 있는 것 맞나?"라는 현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내게 질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는 하버드 연구가 제시하는 '안정된 결혼생활'없이 비혼주의자로 느슨한 관계망을 맺으며 행복한 노년을 준비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만의 행복을 위한 종단 연구, 새로운 설문지가 필요하다.



나만의

시그니처 질문을 만들 때


내 인생을 관통할 어떤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행복한 사람은 "당신은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10점을 주는 사람일까. 실제로는 불행한데 자신은 행복하다(해야만 한다)고 최면을 거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따라서 내 행복에 점수를 매기기 전에 "행복이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지는게 좋다. 소확행 정도로 삶에 만족하고 넘어가려는 게 아니라면, 내면에 정교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답해야 한다. 삶이란 고구마 줄기처럼 아래로 쭉쭉 뻗어가는 선문답의 연속이다.


철학자 데이빗 벨라만에 따르면, 우리가 과거 인생을 돌아보며 구축한 가상의 자아는 삶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행복과 자아를 설계하기 위해 질문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간다면, 상상 속의 자아는 실재가 된다. 자기 서사에 정합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본능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아주 흔한 비유이긴 하지만,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질문은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보통 그 '적절한 시기'는 행복하지 않을 때인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는, 퇴사하기 직전 ...)


SNU 행복종단연구를 맡고 있는 서울대 최인철 교수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그니처 질문'이 있다고 말한다. 제자에게 "아파트, 차, 컴퓨터"가 있는지 물어보는 지도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지위고, "밥은 먹었니"라고 질문하는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식의 끼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질문은 개인의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질문을 갖고 있을까? 우리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질문에 매몰되느라 내면에 대한 질문을 외면해오지 않았는가? 최인철 교수는 이제 우리는 실종된 질문, 내면을 향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당신은 어떻게 늙고 싶나요?


이건 나만의 시그니처 질문이다. 이 질문은 어떻게 늙겠다는 과정에 대한 자세와, 이상적인 노년의 최종 지향점이라는 두 가지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 퇴사를 앞두고 좋아하는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고 다닌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삶이 힘들거나 선택의 순간이 닥칠 때 내 안에서 슬쩍 고개를 들이민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어? 어떻게 살래? 아니, 너 어떻게 늙을래?"


어쩌면 나의 인생이란 질문의 답을 적고, 지우고, 수정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답은 항상 바뀌더라도 내 안에 항상 질문을 가지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나요?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발췌한 내용



※글을 쓰게 된 계기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사족1) 하버드 성인발달연구를 취재한 기자 조슈아 울프 생크에 따르면, 연구 대상자들은 기본적으로 익명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그들 중에는 (얼마 되지 않은 공개 자료로 미루어볼 때) 유명 인사들도 많다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편집장이자 ‘워터게이트 사건’을 심층 보도했던 벤 브래들리도 있고, 모든 기록이 회수되어 2040년까지 공개 불가 상태인 존.F.케네디 전 대통령도 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기자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자료가 비공개 상태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이 연구의 대상자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사족2) 그래서 저는 어떻게 늙고싶냐면요, 친구들의 손자들에게 졸라 멋지다고 소문난 부자 독신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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