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의 기쁨과 슬픔> 회고
작년 12월의 일이다. 쓰고 싶은 글이 많은데 쉽게 써지지 않았다. 꼭 써야 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마감이 있는 것도, 돈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었다. 뭔가 강제적 장치가 필요했다. 그때 나는 한창 각종 스터디(기상, 취업 스터디 등..)를 하고 있었는데, 글쓰기도 '마감 스터디'를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충 생각한 기준은 간단했다. (1) 온라인에서 (2) 정기적으로 (3) 각자 쓰고 싶은 글을 쓰고 (4)안쓰면 벌금을 내는 모임
이왕 하는 거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는 익숙한 사람들과 하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모집 의사를 묻는 글을 정말 러프하게 올렸다.
나 역시 제대로 생각하고 올리지 않았기에 DM을 통해 운영 방식에 대한 의견을 받았다. 다행히 9명이 모였다. 다들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내적 친분만은 높았던 사이버 친구들이다. (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트위터처럼 사용하는 편이다.) 시의적절하게 모임 이름도 만들었다. 마감의 기쁨과 슬픔, a.k.a 마기슬
이왕 모인 김에 바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자기소개를 하고 룰도 쾌속으로 정했다. 카카오톡 특성상 모든 사람이 대화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는 사람과 반장(=나) 나름의 기준으로 빠르게 규칙을 정했다. 어차피 모임이란 건 해보면서 수정해나가면 되니까. 그렇게 정한 규칙은 아래와 같다.
<모임의 大목표>
1. 쓰고 싶은 것 쓰기
2. 마음에 안 들어도 무조건 업로드/발행하기
규칙
-방식 : 기한 내 ‘자기 계정(블로그/브런치/인스타 등)’에 업로드 후 오픈 카톡방에 링크 공유
-내용 : 최소 1,500자 이상의 자유 산문 (에세이, 여행기, 독후감, 칼럼, 기타 등등 아무거나)
-기한 : 주 1회 목요일 자정 업로드 (첫 업로드 : 12/19(목) 24:00)
-한 시즌 : 10주 (12/19~2/20)
-벌금 : 미발행시 3,000원 / 지각 시 1,500원 (벌금은 카카오 모임통장, 최다 출석자에게 보상)
-읽고 응원과 격려(댓글, 좋아요, 어떤 방식이든..)는 필수!!
가장 큰 특징은 글을 올리고 피드백하는 창구로 구글 스프레드 시트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멤버 중 한 분의 아이디어였다.
이전까진 전혀 사용해본 적이 없는 방식이었는데, 큰 장점이 있었다. 우선 (1) 누가 글을 쓰고 안 썼는지 참석률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고 (2) 피드백도 한눈에 볼 수 있어 피드백을 몰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3) 각자 글은 링크를 연결했는데, 브런치나 블로그에 달지 못하는 댓글도 우리만의 공간에 공유하는 재미도 있었고 (4) 마감 현황/벌금 내역 확인 등 운영 측면에서도 효과적인 면이 있었다. (5) 별다른 계정이나 로그인도 필요 없다.
단점은 모바일에서 읽고 쓰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차피 피드백할 때는 모니터 앞에 앉아 각 잡고 했기 때문에, 곧 익숙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10주 동안 글을 쓰고, 시즌 1을 마무리했다.
12월에 시작한 모임은 방학 한 번을 포함해 2월 말에 끝났다. 마기슬은 예상하지 못한 많은 것을 남겼다.
우선, 글이 남는다. 결국 남는 것은 꾸준한 기록이다. 언제 벌써 3월이지, 도대체 뭘 한거지.. 좌절하다가도 적어도 마기슬을 하며 쓴 열 편의 글을 생각하면 내가 조금 자랑스러워졌다. 어찌 됐든 글은 남는다.
용기가 남는다. 마기슬을 하며 글을 쓰는 두 가지 용기를 배운다. 첫 번째는 지나간 나를 마주할 용기다. 두 번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할 용기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감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선 쓰고, '에라 모르겠다' 올려버리기. 마기슬은 매주 확실한 용기를 준다.
책이 남는다. 나는 마기슬을 통해 미뤄오던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애도와 장례에 대한 글이었다. 덕분에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분들과도 만나고, 내 이야기에 위로를 받은 사람도 만나게 됐다. 브런치북 <이것은 애도가 아니다>는 마기슬 시즌 1을 통해 완성한 매거진이다.
가장 좋은 것은 글쓰기 동료를 얻는다는 것. 인스타 친구로만 알고 있던 멤버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었다. 대책 없이 자기 얘기를 해버리는 사람들에게 몇 번씩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무슨 글이든지 꼼꼼히 읽고 정성 어린 응원과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멤버들의 사려 깊은 피드백은 글쓰기의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거의 글의 절반 수준 분량으로 써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멤버 중 한 분이 쓴 글을 몰래 가져와 본다. 이보다 마기슬을 더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이름, 필명, 인스타 계정 정도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사회에 뛰어든 이후에도 여전히 떡볶이 먹는 걸 좋아하는지, 카페에서는 커피를 시키는지 아님 커피 아닌 음료를 좋아하는지, 소주인지 소맥인지 맥주인지 아닌 아무 음주 취향도 아닌지, 그런 사소한 특성 같은 걸 알 턱이 없는 사이다. 아니, 곧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맞대고 표정과 목소리를 나누고 있진 않지만, 글을 맞대고 표정과 목소리를 나누고 있으니.
한 시즌을 끝내보니, 개선해야 할 부분도 보였다.
첫 번째는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루즈해진다는 것이다. 글 쓰는 참여도도 하락하지만, 피드백 참여도가 점점 하락한다. 10주 내내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뒤로 갈수록 호흡이 딸리는 것 같았다.
또 벌금과 보상 체계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었다. 글 미제출과 지각을 구별해서 벌금을 매기는 건(각각 3000원, 1500원) 좋은 방법이었다. 마감 기한에 맞추지 못해 지각하더라도, 하루의 유예 기간을 부여하는 것은 글쓰기를 아예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다. 다만 그렇게 모인 벌금이 매우 많아졌는데, 10주 내내 글을 쓴 사람이 적어 보상이 너무 쏠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그런 보상이 글을 열심히 쓰는 동기를 주긴 한다. 그러나 분배의 쏠림이 커서 받는 사람도 부담이고(인당 몇만 원 이상…),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내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게 확실해지면 보상의 동기 기능 자체가 사라지는 부분도 존재했다.
온라인 모임이라는 것을 고려해, 지속 가능한 모임을 위한 세밀한 장치가 더 필요했다.
그렇게 멤버들의 의견을 반영해 시즌2에 수정/개선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 방학 도입 : 10주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보다는 5주/5주 나누고 중간에 1주 방학을 갖기로 했다. 방학은 재정비의 시간이자, 리셋하고 다시 후반부를 도모할 동기가 되어준다. 따라서 벌금 정산과 보상도 5주 단위로 끊기로 했다. 상황에 따라 특별 방학(?)도 유동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시즌 1 때도 참가율이 떨어지는 후반부에 반장의 권한으로 임시 방학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좋았다. (물론 특별 방학의 핵심은 ‘예상하지 못한’ 방학이라는 점에 있겠다..)
* 면제권 도입 : 10주에 2번은 개인 사정에 따라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면제권을 부여했다. 각자의 호흡을 살려 가늘고 길게 글쓸 수 있기 위한 장치다.
* 피드백 벌금 도입 : 일주일 안에 타인의 글에 피드백을 하지 않으면 벌금 500원을 내기로 했다.
* 보상 : 벌금 정산과 보상은 5주에 한 번씩 하기로 했다. 또 시즌1에는 10주 내내 글을 쓴 사람에게 주기로 했는데, 이번 시즌에는 피드백에 대한 동기를 높이기 위해 ‘글 올출러+ 피드백 올출러’에게 보상을 나누어 주기로 했다.
* 시간대 변경 : 기존에는 목요일 자정까지 제출이었는데, 일요일 아침 7시까지로 마감 시간을 바꿨다. 평일 글쓰기의 부담, 올빼미족 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 인스타그램 계정 개설 : 우리의 좋은 글을 아카이빙하고,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는 용도로 마기슬 인스타그램을 만들었다. 운영 방식은 매주 돌아가며 주간 에디터가 되어 업로드를 하는 것인데, 우선 그때까지는 내가 담당하며 가이드 템플릿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은 시즌 2의 방학 기간이다. 재정비의 기간을 맞이 중간 점검을 해보자면, 개선된 부분이 잘 적용되고 있는 듯 하다. 가장 크게 바뀐 점은 피드백이 엄청 활성화되었다는 점이다. 시간대를 바꾼 덕인지, 500원이라는 벌금 덕분인지, 이번 시즌에는 피드백 시트가 항상 꽉차서 감동적이다. 면제권도 활발히 쓰고 있고, 무엇보다 각자의 글이 성장한 게 눈에 보인다. 역시 글쓰기는 꾸준히 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시즌 2의 예상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다.
내가 제일 열심히 안 해..
1-4주 차의 글을 못썼다. 두 번은 면제권, 두 번은 결석…. 다른 사람들의 동기부여와 나태를 관리하기 위해 각종 장치를 만들었지만 정작 내가 제일 게을렀다. 이런 게으른 방장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독려를 하지 못할망정 계속 빠진다니…. 결과적으로 면제권이나 방학 도입의 수혜는 내가 가장 크게 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글을 안 올리는 못난 방장과 상관없이 마기슬은 잘 돌아갔다는 것이다. 리더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 모임은 각자가 어느 정도 모두 리더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마기슬은 리더가 만든 모임이 아니라 다 같이 의견을 내며 같이 만든 모임이다. 지금 우리의 분위기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함께 의견을 내며 15주간 이것저것 수정하며 성장해온 덕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의 계획은 계속해서 즐거운 마기슬을 지속하는 것!
가까운 사람과
우선 시작하고
룰을 수정해나가자.
혹시 비슷한 모임을 열려는 분들을 위해, 현재 마기슬의 운영 방식을 첨부한다 : 마기슬 운영규칙
마기슬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