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존주의자 선언
전 직장의 신년회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아직 회사의 영업이익이 본격적인 하락세를 타기 전이라, 큰 웨딩홀을 빌려 한 해의 비전을 화려하게 선포하는 본부 행사가 가능하던 때였다. 그날은 약 200명 정도 되는 경영지원본부 임직원의 신년회였다. 총무, 인사, 교육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바글바글하게 홀 안으로 모였다.
본격적인 신년회와 식사를 하기 전, 총무팀의 말 잘하는 선배들이 경직된 분위기를 깨기 위한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내용은 화면에 뜨는 ‘인사 정보’의 주인공이 어느 팀의 누구인지 맞추는 것이었다. 회사 임직원들의 인사 정보를 조회할 권한이 있는 경영지원본부라 가능한 게임이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세 명 있는 이 사람은?”, “취미로 서핑을 하는 이 사람은?” 같은 식이다.
무관심하게 뷔페 음식을 뒤적거리고 있던 나는, 화면에 뭔가 익숙한 내용이 뜨는 것을 보고 땀을 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이런 문제가 떴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취미 : 수상 소감 보기
나였다. 취준생 시절, 자기소개서를 쓰던 과거의 나는 실제로 그때 내가 가장 빠져 있었던 취미를 적었다. 그때 나는 아카데미나 에미상, 토니상, SAG(미국배우조합상), BAFTA(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해외 유수 시상식의 수상 소감을 보는 것을 정말로 취미로 갖고 있었다. 언젠가 취미나 특기에는 실제로 시킬 수 없는 것(스노보드나 수영 같은 것)을 적는 게 좋다는 팁을 듣고 썼던 거 같기도 하다. 나한테 수상 소감을 보라고 시키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 계산은 청계산입구역의 웨딩홀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당연히 아무도 그게 누군지 맞추지 못했고, 사회를 보는 선배는 나를 가르키며 마이크를 건넸다. 갓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로 가득 찬 홀에서 초밥을 먹다 당황해 웅얼웅얼 이상한 헛소리를 했고 (“잘생긴 남자를 보고 싶어서요…”) 갈 길을 잃은 마이크는 곧 사회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희 씨는 정말 창의적인 취미를 갖고 계시네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얼마 후 가라앉았다. 그러나 민망함의 감정은 곧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분명 인사 기록 카드에 적힌 나의 취미는 개인정보다. 그런데 왜 나의 가장 개인적인 정보가 정초부터 회사 사람들 앞에서 까발려졌을까? 이런 식으로 내 인사 정보가 신년회 퀴즈의 소재로 쓰여도 괜찮은 걸까?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이러한 의문은 계속해서 커져갔다. 빅데이터, AI, IoT를 활용해 임직원의 정보를 어떻게 관리∙지원할 수 있을지는 회사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채용과 승진 단계에 ‘인공지능 챗봇’이 개입했고, 임직원들의 관심사를 파악해 맞춤형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회사가 임직원의 정보를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발견할 수 없었다.
최근 한 스타트업은 신입사원이 퇴사할 시점을 분 단위로 예측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신입사원이 적어도 1년 이상 근무할지 패턴을 매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 자료를 통해 질병이나 산후우울증을 예측하는 시스템이 개발되기도 했다. 해당 시스템은 증상이 시작되기 ‘몇 달 전에’ 우울증 발생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우울증 예방에 사용될 것이란 초기 개발자의 예측과 달리, 해당 기술은 현재 채용 시스템에 적용되어 우울증 발병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가려내는 데 사용되고 있다.
나는 회사가 나의 정보를 동의 없이 수집해 퇴사 시기를 점치거나, 나보다 일찍 우울증을 예상하거나, 그것을 이유로 나를 채용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SNS에 흩어진 정보의 부스러기로 나의 성격, 정치, 성적 취향을 추측하고, 이를 토대로 나도 모르게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채용 과정에서 기업의 불확실성이 줄어든 만큼, 개인의 고용 기회 역시 줄어들지 모른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정보가 홍수처럼 불어난 지금, 개인의 사적인 데이터에 대한 권한과 활용 범위에 대한 섬세한 논의가 필요한 때다.
바야흐로 가장 창의적인 테크 기업들이 가장 개인적인 영역을 침해하는 시대다. 그날 이후 나는 웬만하면 컴퓨터와 인터넷에 내 사적인 정보를 남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습관이 생겼다. 내 마지막 퍼스널 영역에 대한 나름대로의 수호였다. 그래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란, ‘정보 제공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를 클릭하는 정도밖에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매주 두 번, <싫존주의자 선언>의 글이 브런치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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