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존주의자 선언
그런 방을 본 적 있다. 원룸 입구에 위치한 주방의 개수대엔 설거짓거리로 가득 차 있는 방. 프라이팬에는 기름 낀 음식물이 말라붙어 있고, 유리컵 바닥엔 푸른곰팡이가 피었다. 주방에서 침대까지 거리는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지만, 발 디딜 틈이 없어 한 발자국마다 공백을 찾아야 한다. 피자, 치킨, 떡볶이, 광어회 등 온갖 종류의 배달 음식이 박스 그대로 널려있고 어떤 봉지에는 구더기도 꼬여 있다. 날파리가 좁은 열 평짜리 방을 쉴 새 없이 날아다닌다. 침대 위에 옷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누울 자리는 무릎 굽힌 사람 한 명 누울 정도다. 침대 주변에는 콜라가 흐른 자국이 딱지처럼 굳어져 있다. 청소한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그 의지는 느낄 수 있는 50리터 쓰레기봉투 열 개 묶음. 집 밖에 나갈 때나 뿌리는 섬유탈취제. 인터넷인가, TV에선가 본 듯한 히키코모리의 방.
이 방은 사실 내 방이었다. 불과 몇 년 전, 오피스텔에 살던 사회초년생이었을 때다. 그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살 때나, 하숙집에서 살 때도 비슷했다.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는 큰 무기력에 빠졌고 그때마다 집은 쓰레기방이 됐다. 삶은 일과 수면으로만 나뉘고, 일상을 돌볼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씻는 것도 목욕탕에 가서 씻고, 마지못해 해야 할 일은 카페에서 했다. 내 몸의 터전인 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나를 오히려 집에서 쫓아냈다. 집에서는 그저 좁은 침대에 누워 킬링타임용 영상이나 인터넷 게시글을 봤다. 시간을 죽인다는 말이 가장 적절했다. 그 방은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무기력의 끝을 찍고 일말의 감정조차 사라진 건조한 사막 같은 시기에 갑자기 마법에서 깨어나듯 청소를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불안이 특정 사건에 맞물려 피할 방도가 없을 때 그랬다. 하숙집 아줌마가 찾아온다거나, 긴 출장을 떠나고 돌아왔을 때나, 이런 꼴로 살고 있는 것을 친구들에게 들켰을 때. 한 번도 그런 방을 겪어본 적 없었을 친구들이 깜짝 놀라 대신 방을 치워준 적도 있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서 청소한 게 아니라 어쩌다가 (우연찮게) 청소를 하고 깨끗해진 방을 보며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가 자의고 어느 정도가 타의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냥 운이 좋으면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무기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을 잘 모른다.
언젠가 글쓰기 강의에서 선생님은 ‘자기 디스의 힘’에 대해 말했다. 부족한 나를 드러내는 것엔 힘이 있다고. 인간은 모두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의 좋은 점만 늘어놓고 싶은 욕망을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자기 객관화가 된 사람은 용기 있게 부족한 점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성숙한 사람에게만 그런 ‘자기 인식’ 능력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했던, 답이 없는 흑역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선생님은 말해주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는, 그 자체로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다. 치기 어린 시절, 감정의 과잉에서 비롯한 재미난 사건 사고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증거들. 그 나이를 먹고, 다 큰 어른이 되어서는 하지 않을 행동들….
히키코모리처럼 더러워진 내 방. 이런 것은 비료로도 못 쓰고 부유하는, 내 삶의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 같은 이야기 같다. 그런 이야기는 멋있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성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이것들이 도대체 내 삶에 어떤 인식을 준단 말이지? 아무리 ‘자기 인식’을 해봐도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 쓰레기방 관련 게시물이 올라오면 약간은 비장한 마음으로 클릭한다. 일본 웹사이트의 히키코모리나, 네이트판에 자취생 썰 같은 것이 올라오면 먼저 대충 사진이나 영상을 훑어보며 얼마나 더러운지 가늠한다. 그리고 댓글을 확인한다. “이 정도면 정신병인 듯”, “저기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음?”, “개민폐다.” 사진과 댓글을 보며 ‘난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지’라며 거리두기를 한다. 그런데 결국 내가 감정의 거리를 좁히는 대상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진 속 주인공들이다. 말도 안 되는 저 방이 처음부터 저러진 않았을 거라는 공감, 어느 마지노선을 넘으면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다는 경험에 바탕한 진실, 운이 나쁘면 나도 충분히 저렇게 될 수 있었다는 약간의 섬뜩함.
최근에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읽었다. 특수 청소 서비스 회사 ‘하드웍스’를 차린 김완 대표가 죽음 현장에 드러난 흔적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쓰레기로 가득 찬 방을 치우며 동전과 지폐들을 무수히 찾는다. 나는 쓰레기방에 유독 지폐와 동전이 많은 이유를 알고 있다. 삶이 쓰레기가 되면, 돈이나 쓰레기나 똑같이 가치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나의 흑역사에서 그나마 의미를 뽑아보자면 이 정도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
어쩌다가 삶이 나빠지고 운이 좋게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 그런 게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히키코모리, 저장 강박, 우울증 등 각종 용어들로 비정상적인 타인과 정상적인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은 쉽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는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명하게 양분되지 않는다. 약간의 운이 좌지우지하는 스펙트럼에 가깝다는 걸 안다.
나도 그때 운이 나빴다면, 대신 치워준 친구나 하숙집 아주머니나 출장이 없었다면,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자주 감정의 고삐를 상실하고, 일상성이 무너지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떤 시그널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짐작해본다. 어쩌면 나는 아주 깊은 우울로 빠지기 전에 수렁에서 건져준 주변인이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방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핍의 경험은 비슷한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는 한 끗 차이다.’ 이건 내가 나의 잊고 싶은 기억들에서 얻은 단 하나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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