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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r 28. 2021

빌린 돈으로 여행을 떠난 대학생을 위하여

싫존주의자 선언

얼마 전 커뮤니티에서 본 기사 하나가 있다. 제목은 「가난한 대학생 도우려 만든 생활비 대출받아… 여행 가는 휴학생들」이었다. 의도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용 역시 전형적이었다. 생활비 대출 제도는 돈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교통비, 밥값, 책값으로 쓰라고 도입된 제도인데 요즘 대학생들은 생활비를 대출받아 해외여행을 갔다 오며, 가상화폐에 투자하고, 유흥비로 탕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부정 대출을 받기 쉽고 감시가 허술한 탓이며, 소득과 관계없이 대학생이면 누구든 나랏돈으로 생활비 대출을 받게 한 것은 청년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대목도 있었다. 대상을 저소득층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말까지, 완벽한 한 편의 시나리오였다.

‘해외여행, 가상화폐, 유흥비, 나랏돈, 포퓰리즘, 저소득층 한정…’. 문장 하나하나에서 언론에서 흔히 보던,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해 뭔가 불순한 것을 이뤄보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댓글 반응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경제관념이 없고 멍청하다, 빚 무서운 줄 모른다”, “여행 가고 싶으면 알바를 해서 가야지 나랏돈으로 여행 가는 게 한심하다”, “대출을 받아서 가야 될 여행이면 시작을 하지 말아야지, 필수도 아닌데 돈도 없으면서 가는 건 좀 아니다”, “덕질이나 성형하는 데 생활비 대출을 사용하던데 복지 악용이다” 등등….

나도 대학생 시절에 생활비 대출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총 학자금 대출액 2천만 원 중, 절반 이상이 생활비 대출이었다. 등록금은 지원하는 곳도 있고, 국가장학금의 비율도 높아지고 있어 비중이 점차 줄었지만, 생활비는 졸업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신청했다. 아르바이트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매년 과외 중개 사이트에 몇만 원씩 납부하며 학부모들의 전화번호를 열람해 과외를 얻고 대치동에서는 학원 알바를 했다. 그래도 하숙비, 통신비, 생활비, 책값, 밥값, 교통비를 다 충족하긴 어려웠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다는 다짐은 가끔씩 무너졌다. 가끔 돈이 정말 없을 때는 핸드폰 소액결제로 월말을 버티는 경우도 흔했다. 소액결제나 티머니로 먹을 수 있는 건 편의점 도시락이나 빵 같은 주전부리밖에는 없었지만. 생활비 대출은 그런 빠듯한 생활에 확실한 여유가 되었다.

내가 생활비 대출을 사용한 가장 큰 이유는, 수중에 돈이 있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하숙비가, 통신비가, 책값이, 밥값이, 동아리 회비가, 스터디방 비용이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조하게 쓰지 않고 가진 돈에서 여유롭게 차감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한국장학재단 사이트에서 정의한 생활비란 “학생의 생활 안정을 위한 비용으로서 숙식, 교재 구입, 교통비 등”으로 명시되어 있다. 사실상 가난한 대학생 입장에서는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타이밍이 중요하지, 그런 분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돈 들어오는 타이밍에 따라 술값이 생활비고 책값이 사치가 됐다.

실제로 생활비 대출자의 91%가 등록금을 대출한다. 등록금만 대출하는 학생에 비해 생활비 추가 대출자의 등록금 대출 총액이 더 높으며, 사회경제적 배경은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경제적 부담이 비교적 큰 학생들이 생활비 대출 제도를 이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러 가상화폐나 유흥비를 언급하며 비난 분위기를 조성하고 생활비 대출의 지원 대상을 좁히려는 기사는 세수 부족을 부자증세가 아닌, 얼마 없는 복지제도를 공격해서 메꾸려는 의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상으로 주는 돈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갚아야 할 돈인데, 타인이 ‘경제 능력’이나 ‘한심함’을 운운하는 것은 왜일까? 대학생들의 과도한 생활비 대출로 국가경제에 타격이 있기라도 했을까? 미국의 경우 학자금 대출 연체자가 늘어 사회적 비용이 발생했다는 연구가 있으나, 이는 미국이 학자금 대출에 등록금뿐만 아니라 주거비, 교통비 등 생활비까지 포괄하는 총금액을 제공하여 생활 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대학생의 생활 안정과 상환 부담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는 한국 사회에서, 무작정 생활비 대출받는 대학생을 비난하는 것은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철학자 고병권은 책 『묵묵』에서 가난한 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부채인간』를 가져온다. 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사회적 권리’를 ‘사회적 부채’로 전환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구성원의 당연한 권리마저 공동의 파이에 대한 손실로 취급하고 수혜자들을 채무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권이나 장애인 연금, 생활비 대출이 대표적이다. ‘가난한 네가 감히 분수에 맞지 않게 여행을 간다’의 기저엔 채무자에겐 여행 갈 권리가 없다는, 그들은 감히 책값이나 숙식비 이상으로 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깔려 있다. 그러나 돈을 빌리고 잘 갚는다면, 대출받은 생활비를 감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의 대학 시절에 있어 가장 아쉬운 점은 교환학생이나 해외여행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감히 그때 가난한 내 상황에서 여행을 가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건 내 삶의 옵션에서 완전히 배제된 선택지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대학생들이 생활비 대출을 받아 해외여행을 고민하는 것이 좋다. ‘필수도 아닌데 돈도 없으면서 굳이’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기쁘다.

『묵묵』에서 고병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초생활수급권자인 주제에 감히 해외여행을 두 번 씩이나 다녀온 사람을 존경한다.” 나도 똑같이 말하고 싶다. 나는 감히 빌린 돈으로 해외여행을 간 대학생을 존경한다.

※매주 두 번, <싫존주의자 선언>의 글이 브런치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