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잠시 다른 세상 사람이 될 수 있죠.
뭔가 쓸 일이 있어서 필기도구를 찾다가 오래전에 선물 받은 만년필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만년필.
좋은 글 쓰라고 후배가 사준 만년필이었는데 언젠가 써야지 하고 넣어 둔 게 벌써 7년이다. 이미 잉크는 다 말라서 흔적도 없이 텅 비어있었지만 한 번도 종이를 접해 보지 않은 펜촉은 여전히 뾰족하게 날이 서있다. 왜 지금까지 자신을 외면해왔냐는 듯 눈꼬리를 흘기는 것 마냥.
온 방을 뒤져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병을 찾아 만년필을 흠뻑 적셨다. 아 7년 동안 느꼈던 갈증의 탓일까? 한참을 병 속에 재워 두었는데도 생각처럼 글씨가 되어 나오질 못한다. 흔들고 닦아보고 한참을 종이에 문질러대니 그제야 까만 잉크 선이 펜촉을 타고 종이 위를 흐르기 시작한다. 아... 7년 만에 토해 내는 들리지 않는 환호성이다.
포르투갈제 푸른 노트의 마력에 빠진 시드니 오어 마냥 난 먼지 투성이 책상 서랍에서 인생의 초반을 보낸 작은 만년필의 마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글이 써진다. 내 머리가 내 마음이 아니라 손목의 각도와 손가락 근육이 작은 펜촉과 노트가 만나는 그 꼭짓점을 이동해가며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내 안의 일부를 아우성처럼 토해내기 시작한다. 내 지저분한 책상 앞에서 난 그렇게 다시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