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법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비극의 중심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저자에 대한 불경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에서 개인적 경험과의 유사성을 느꼈다. 저자는 시대의 악이 만든 물리적 수용소에서 인간을 박탈당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가상의 수용소에 나 자신을 가두고 죄책감의 굴레를 씌우고 스스로에게 선고한 형기를 사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벌을 선고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우울증에 사로잡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기력에 몸을 뺏긴 채 간신히 숨만 쉬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내 인생의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런 나를 끊임없이 비난했고 나의 수치심을 지치지 않고 자극했다. 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이렇게 부족한 나 자신에 커다란 죄의식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나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애정이 없는 그 자체가 부끄럽고 죄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무기력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 대신 스스로를 더 완벽한 죄수로 만드는데 열을 올렸다. 삶의 의미나 나의 의지를 북돋는 도전에 눈 돌리는 것보다 무기력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것은 나 같은 죄인에게는 사치라 여기고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현실을 정당화했다. 어느덧 내 인생의 유일한 아군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내 옆에서 내가 만든 가상의 수용소의 카포가 되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죄인으로 판결하자 그에게도 나는 죄인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의 카포가 되어 나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무기력한 나를 끊임없이 겁박하던 그 사람은 결국 그 역할에 지쳐 이별을 고하고 먼저 내 곁을 떠났다. 간수가 사라진 수용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폐쇄 절차를 밟았다. 어떤 의지도 의미도 없이 무기력한 삶을 살던 나에게 수용소는 나의 인간으로의 가치를 박탈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유일한 삶의 공간이었기에 난 형기가 끝나 풀려난 늙은 죄수처럼 한참을 무기력하게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쇼생크 탈출의 늙은 죄수 브룩스처럼.
위로를 갈구하고 흐릿하게 남아 있던 삶의 의지를 억지로 깨우며 약물 치료를 받고 상담을 받았다. 공석이 되어 버린 간수의 자리(내 삶을 좌지 우지 하는 또 다른 존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한 허망한 시도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우연하게 읽게 된 이 책에서 나는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다. 삶의 시련이나 고통은 끔찍하고 괴로울지언정 절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저자의 말은 어떤 상담 치료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난 이제 더 이상 어떤 수용소도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다. 헛되이 보낸 시간에 대한 후회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삶이 끝날지라도 내가 보낸 모든 고통과 경험은 의미 없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간수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난 영원히 죄수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