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지하실의 비밀
2044년, 서울 중심가 어느 빌딩.
GHR는 에너지 관련 솔루션 기업으로 연간 수천만 달러의 매출로 세계적인 명성이 나 있다. 경기 유동성과는 상관없이 각종 특허로 얻는 막대한 수익으로 시장에 흩어져 있는 핵심 인물들을 신속하게 영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A 역시 이 시장에서 꽤 평판이 좋은 인물로 1년 전에 스카우트되어 인사팀 채용 담당으로 일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이 회사 건물 지하실에서 특별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 괴소문이 커지기 전에 단속하라는 상사의 지시가 있었기에 A는 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 지하실 괴소문에 대해 아세요, 부장님? 요새 우리 회사 최고 이슈던데?” 평소 친하게 지내는 최 부장에게 잠깐 말을 걸었다. “흠 나도 듣긴 들었는데, 뭐 그냥 가십 아니야? 지하실 뭐 리모델링하는 거 아닐까?” 최 부장은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냐며 남은 업무를 위해 자리를 떴다.
“이 대리님, 혹시 우리 회사 지하실 괴소문 들어봤어요?” 영업팀 이 대리는 회사 최고 마당발로 소문나 있어 특별한 답을 기대했다. “어? 아뇨. 저도 그냥 누군가 지어낸 루머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인사팀이니까 아시는 거 있죠? 저도 좀 공유해주세요.” 라며 되물었다. A는 질색하며 이 대리를 떨어뜨리고 급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처리 못 한 서류를 분류하기 위해 모니터를 터치했다. 그때 사내 메신저 알림 아이콘이 모니터 구석에서 움직였다.
’ 뭐지? ‘ < B101, 비밀 프로젝트, 위험한… > 이상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이 들어 송신자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름이 표시되어야 할 영역에 아무런 텍스트도 보이지 않았다.
‘어? 누구지? 그리고 이름 없이 메신저가 가능해?’
A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사무실 전체를 훑어봤다. 그저 조용하게 모니터를 응시하는 직원들과 조용히 움직이는 안드로이드 비서들만이 있을 뿐이다. < 누구신데 이런 장난을 하는 거죠? > 라고 묻자 < 그건 지금 밝힐 수 없음. 시간 촉박. 퇴근 시간에 B101로. 부탁>이라고 답신이 도착한다. A는 순간 짜증이 났다. 잠시 후면 화상회의가 있다. 이런 쓸데없는 장난에 놀아날 수 없다. 채용해야 하는 인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장난 같은 메시지를 삭제하고 금세 업무에 몰입하기로 한다.
시간은 금방 흘러 직원들은 하나 둘 씩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다. A도 기지개를 켜고 크게 하품하며 시간을 확인한다. ‘그래, 내일 하자.’ PC의 전원을 끄려는 순간 다시 한번 메신저의 알림이 울렸다.
< B101, 급해. 빨리.> A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누구야? 도대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PC의 전원을 껐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만원이라 할 수 없이 계단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며 이 건물을 나가기 위해 서둘렀다. 어느새 1층 로비와 지하실 방향으로 나눠지는 구간에 도착했다. 평소엔 뒤돌아보지 않고 1층 로비로 나갔겠지만 뜬금없는 메시지 때문에 망설였다. 그는 지하실로 향하는 발걸음에 자신도 놀라면서 알 수 없는 메시지에 대해 응답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B101로 향했다. 전에 왔을 때와 다름없는 철제문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특별한 기운도 문제도 없어 보였다. 달라진 점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 때 직원 카드를 인식시키는 단말기가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 복도에서 내부로 들어갈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 리모델링했나 보지… 그냥 가자’ 라고 안도의 숨을 쉬며 돌아서는 순간 내부에서 굉음과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문을 치며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들렸기에 A는 순간 몸을 돌려 문 표면에 귀를 바짝 대었다. “살…살…려줘! 더 이상 못해! 못 하겠어!“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 동시에 머리에 강렬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머리에서 흘러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새벽 6시 분당 탄천 공원. 탄천 공원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러 나와 있다. B 역시 분위기가 좋아 오늘도 짧게 운동하고 출근할 생각에 들떠 있다. 오늘은 특별히 러닝 크루들과 함께 운동하는 날이라 서둘렀다. 하나 둘 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총무는 인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B는 모여든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몸을 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A가 보이지 않았다. A는 회사 동료이자 같은 취미를 가진 몇 안 되는 동기라 자주 함께 운동하며 친분을 쌓아가던 사이였다.
“총무님! A 오늘 안 오기로 했나요?” “어? 그런 연락 못 받았는데… 어디 아픈가?” B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출발한다는 신호에 열을 맞춰 달리기 대형을 준비했다.
‘이따 연락해 보지 뭐…’
A는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흐릿한 형체가 보였고 알 수 없는 소음도 들리는 듯했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었다. 곧이어 흰색 실험복을 입은 몇 사람들이 다가왔다.
“움직이지 마. 지금 검사 중이니까.” 그들 중 한 명이 단호하게 말하면서 A의 팔을 제지했고 이미 채혈을 당하고 있었다.
“당, 당신 누구야! 그리고 이거 뭐야! “A가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그건 알 필요 없고, 이봐 여기 유니폼 준비해” 연구원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옆에 있던 안드로이드가 유니폼을 들고 왔다. A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방이 막혀 있어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굉장한 소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막연히 B101의 어디쯤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다 발끝에 세워진 대형 디스플레이를 보고는 경악했다.
거기엔 수백 명쯤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제히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기괴한 광경이 있었다. 공간 중앙에는 거대한 전기 모터 같은 것이 무미건조한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이 설비를 중심으로 수백 개의 러닝머신이 배치되어 있고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카메라 화면은 수시로 바뀌면서 그 사람들의 얼굴을 낱낱이 비추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평범한 러닝이 아니었다. 다들 케이블이 연결된 헬멧을 쓰고 감정이 거세된 표정으로 달리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A는 떨리는 목소리로 연구원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다들 적응하는 데 몇 시간이 안 걸렸으니까.” 연구원은 채혈을 마치고 태블릿을 몇 번 터치하더니 안드로이드에게 짧게 명령한다.
“이 사람, 잘 감시해“ A는 눈을 질끈 감고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집중했다. 괴소문에 이끌려 내려왔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붙잡혀 알 수 없는 시설에 감금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끌려왔다는 이야기인가? 괴소문을 단순한 가십으로 생각한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B는 시원한 탄천 공원을 달리며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하는 운동이지만 이제 점점 중독적으로 좋아지는 것 같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목표했던 구간 반환점을 돌았다. 그때 크루 중 한 명인 C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B 님. 오늘도 나오셨네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친하진 않지만,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라 가볍게 목례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달리기 컨디션 좋아 보이시네요? ” “하하, 처음엔 힘들었는데 금방 적응되네요.” C와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B는 자연스럽게 그의 장비에 눈길이 갔다. 특히 땀을 흡수하는 헤드밴드 디자인이 독특했다. 큰 글씨로 HR이라는 타이포그래피가 선명했다. 그러고 보니 크루 중 몇 명이 비슷한 디자인 용품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 저 혹시 HR이 스포츠 브랜드인가요? 우리 크루에도 몇 명이 하고 있던데요?“ “ 아, 이거요? 브랜드는 아니고 개인 맞춤형 러닝 프로그램이에요. 저도 이거 사용해 보고 실력이 점차 늘더라고요. ” “ 맞춤형이라? 좋네요! " B는 HR을 몇 번씩 되새기듯 중얼거리며 종착점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A는 안드로이드 감시 아래 유니폼을 갈아입고 천천히 기괴한 공간에 들어섰다. 안드로이드는 친절한 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했다. “ 당신은 이제부터 HR 프로그램의 새로운 자원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일 일정량의 에너지를 생산해야만 하며,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저성과 인원으로 분류될 경우 페널티를 받을 것입니다. 러닝머신은 맞춤형 프로그램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휴식 시간을 자동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신체 이상 여부는 지속적으로 모니터링되기 때문에 어설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기괴한 안드로이드의 안내에 따라 A는 문제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서서 헬멧을 썼다. 기분 나쁜 차가운 금속 질감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러닝머신 모니터에 큰 숫자가 나타났다. 동시에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뜀박질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디스플레이의 숫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탕’하는 굉음에 반응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옆을 보니 어떤 사람의 머신이 고장이 났고 주위로 수리 안드로이드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쓰러진 사람의 얼굴이 궁금했다. 멀리 있어서 처음에 잘 안 보였는데 분명 최 부장이었다. ‘최 부장도 여기에 있는 거야? 어쩌다가?’ 그는 허둥지둥한 얼굴로 연신 많은 양의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입사 후 처음 보는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순간 A는 최 부장과 눈이 맞았다.
‘ 어 최 부장님! 여기에요 도와주세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감시의 눈이 너무 많았다. 최 부장은 이상하게 특정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A는 정신을 차리고 그 신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 디스플레이를… 스크롤… 하라고? 스크롤, 앤 스크롤? ’ 알았다. 디스플레이에 집중하지만 말고 계속 스크롤 해라. 대충 이런 뜻인 거 같았다. 만약 이것이 작동한다면 머신은 일시적으로 고장 날 것이고 안드로이드가 몰려올 것이다. 쓰러진 최 부장은 안드로이드에게 이끌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휴식인가? 아니면 처형인가? 사라진 그의 모습을 뒤로 하고 A는 안드로이드의 이동 패턴을 머릿속으로 그려야만 했다. 자신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점에 모니터를 무한 스크롤 하기 위해서다.
몇 분이 흘렀을까? A는 자기 주위로 안드로이드가 가장 멀어졌을 때쯤 행동을 시작하기로 한다. 반응이 없는 모니터를 최대한 스크롤 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반응이 없지만 최 부장의 힌트만이 지금은 답이다. 스크롤! 스크롤! 스크로로로로롤!
띠리리리리릭. 머신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느려졌고 모니터의 숫자가 알 수 없는 기호로 꿈틀거렸다. 그래! 성공이다! A는 느려진 머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머신의 이상 소음으로 금세 안드로이드들이 몰려왔고 수리를 시작했다. 동시에 경비 안드로이드가 A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눈앞에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 보였다. 휴식실이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고 감시용 CCTV 모니터들이 곳곳의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과 함께 감시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회사에서 전혀 본 적 없는 외부인이다.
그러다 무심코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러닝 크루 C!’ 그는 무리 앞에 서서 감시 방향을 지시하는 듯 보였다. 그가 늘 차고 있던 헤드밴드가 이제 생각났다. “HR”이라고 크게 쓰여 있어 궁금했었는데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게다가 우리 회사에.
휴식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C가 고압적인 자세로 인사했다. “A님 오랜만이에요. 요새 많이 바쁘셨나 러닝 크루에서 안보이시더니...” "이게 뭡니까? C님. 저 좀 풀어주세요." "A님, 음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이건 순전히 본인 의지에 의해 결정된 상황입니다.” “네?” "메신저 메시지 보셨죠? 그거 일종의 초대장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보내진 않아요. 러닝 잘하는 사람만. 그리고 호기심 많은 사람만. 하하하" C의 웃음소리에 A는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