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위에 덧댄 고독의 색은 희었다. - 한강 소설,『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잘못 칠한 것을 덮기 위해 그 위에 물감을 덧대곤 한다. 이럴 때에는 그 부분이 완전히 말랐는가가 중요하다. 덧대는 물감의 농도, 양 등이 좌우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백지를 한 번 덮었던 물감이 끝끝내 마르기를. 그 위에 무엇이든 다시 그려낼 수 있기를.
물감이 마르는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를 내버려 두는 것, 고독이란 그런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감정 모두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외로움과 고독은 사전적 의미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심리학·철학적으로는 뚜렷이 구분된다. ‘외로움’이란 내가 타인을 필요로 함에도 ‘거절당한 소외’를, ‘고독’은 그것을 넘어서는 ‘자발적인 자기 격리’를 의미한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은 우리에게 주어진 끝없는 과제이다. 고독이란 감정은 나를 온전히 이뤄내기 위해 꼭 필요한 재료이다. 그러므로 외로움과 고독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이라는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해가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라며 사람의 손때를 잔뜩 탄 『흰』(문학동네, 2016)이라는 책을 북카페의 가판대 위에서 만났다. 책을 발견하자마자 ‘이것을 과연 희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일었다. 그리고 몇 장을 넘기다 문득 이 글이 지닌 흰색이, 이 책을 읽어내는 우리들을 덮어낼 모습이 궁금해졌다.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 (36쪽)
아기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까지 절규하던 어머니로부터 잉태된 두 번의 죽음 위에서 ‘나’는 태어났다. 자신이라는 생명이 그이들이 죽은 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나’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제 어머니의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이 작은 아이가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었을까. 『흰』은 ‘나’의 어머니가 임종 직전까지 ‘나’의 삶 이전에 부스러졌던 두 죽음을 어루만지는 동안,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존재했을 ‘언니’의 삶이라는 백지 위에, 차마 무언가를 칠하지 못하겠는 마음으로 자라온 ‘나’의 삶이 꾹꾹 눌러 담긴 소설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어린 짐승들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달떡같이 희다는 게 뭘까, 궁금해하다가 일곱 살 무렵 송편을 빚으며 문득 알았었다. … 아직 찌지 않은 달떡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곱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얼기설기 솔잎들을 매달고 접시에 담겨 나온 떡들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고소한 참기름에 반들거리는, 찜 솥의 열과 김으로 색깔과 질감이 변형된 그것들은 물론 맛이 있었지만, 눈부시게 곱던 쌀 반죽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말한 달떡은 찌기 전의 달떡인 거야, 그 순간 생각했었다. 그러자 쇠에 눌린 것 같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22-23쪽, 달떡)
마치 찌기 전의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그이가 죽은 자리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겨우 일곱 살 배기였던 ‘나’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찌기 전의 달떡과 쪄낸 후의 달떡의 색을 대조하며 자신이 어머니에게 거절당했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곧 ‘그이(언니)’처럼 눈부시게 곱던 흰색으로의 열망과, 그이를 끌어안느라 자신에게 부재했던 어머니로부터 발생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나’의 안에서 충돌한다. 차마 ‘애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던 ‘나’의 명치가 쇠에 눌린 것 같이 답답해졌던 경험은 자신의 미성숙한 감정을 느낌으로나마 짐작했던 것이었을 테다.
이 낯선 도시에서 왜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거리를 걸을 때 내 어깨를 스쳐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26쪽, 안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괴롭게 할 때 그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도망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나’가 도망치듯 찾아든 낯선 도시는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닌, 자신의 내부 한가운데였다. ‘나’는 낯선 도시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자신이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을 떠올린다. ‘나’가 도망친 것은 스스로의 의지였으며, 도망친 곳에서 떠올린 ‘나’의 생각들은 고독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독을 통해 ‘나’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그녀(언니)’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38쪽, 그녀)
‘나’는 평생 상상적 타인인 ‘그녀(언니)’를 자신의 삶 안에 품고 살아왔다. 태어나자마자 알지도 못하는 언니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나’의 여태까지의 삶을, 가히 어떤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낯선 도시에서의 다양한 흰 감각을 경험하며, 안개가 끼어 있는 이 낯선 도시가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임을 알게 된다.(30-31쪽) 이는 궁극적으로 고독을 경험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이곳에서 미지의 타인인 ‘그녀’를 계속해서 떠올린다. 그리고 어머니가 느꼈을 상실의 고통을 떠올린다. 낯선 도시의 여정에서, ‘나’는 ‘고독’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애도를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9쪽)
강보, 빛이 있는 쪽, 안개, 하얗게 웃는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작가는 흰 것들에 대해 목록을 떠올리고, 그 위에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가 나열한 목록은 물성을 가진 명사뿐만이 아니며, 이들은 시각적인 감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경험을 선사하고자 하였다. 그런 『흰』은, 다양한 이야기들로 주조된 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하얗게 보인다.”(34쪽,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우리의 인식은 한계가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색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색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색들은 조금 전까지 우리 뇌가 기억한 빛과 새롭게 나타나는 빛 사이에서 일어난 시신경 교란이 만들어낸 색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는 한시도 정확한 색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앞서 제시한 “이것을 과연 희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볼 수 있다.
『흰』이라는 책에서 작가가 선사하고자 하는 경험은 제임스 터렐의 <간츠펠트> 전시와도 비슷하다. 전시에서 눈을 통한 감각 정보와 뇌에 의한 인식체계는 마치 파도 앞 모래성처럼 덧없이 허물어진다.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판단하는 데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터렐은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질문하고, 내 안에 진실이 아니었던 진실을 받아들이게도 한다. “모든 순간은 진실이 아니고 인간의 한계를 진실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진실이 아닌 순간도 없다.”(김종진(2018),『미지의 문』, 효형출판, 183쪽.)
작가가 책에서 흰색을 주조하고 풀어내는 방법은 이러한 지점과 맞닿아있다. 작가가 명명한 흰 것들에 대한 목록과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고독의 과정을 대변한다. 우리는 책장을 넘기면서 작품의 고독을 마주하고, 매 순간 새로운 색과 감정들을 경험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나-그녀-모든 흰’의 순으로 배치하여, 목차라는 소설의 장치로써 이러한 경험의 과정을 설계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읽어가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고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한 진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얻으려는 방, 그 겨울부터 지내려 하는 방의 문이었다. (16쪽, 문)
깔끔하게 마무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16쪽, 문)
흰 것에 대한 목록들로 풀어가는 이야기는 「문」이라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문이란, 입구인 동시에 출구가 된다. 소설의 도입부를 여는 ‘나’라는 목차에 있는 「강보」, 「배내옷」이라는 이야기는, ‘모든 흰’이라는 목차에 가서는 「수의」, 「소복」이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와도 퍽 닮아있다. 그리고 이들을 흰 묶는 시이자 이야기가 바로 「문」이다. ‘나’가 ‘문’을 대했던 행동들은 ‘나’와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 고독 속에서 마주한, 자신의 삶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83쪽, 각설탕)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106쪽, 갈대숲)
필자는 『흰』이 시사하는 바가 삶에 물감을 덮는 것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물감을 덮어내는 것은 흉한 부분을 가리는 부정적인 행위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이는 그 부분조차 그림으로 인정하는 과정이며, 치유이자 완성으로의 과정이다.
상처투성이의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 쉬다가 한 시간 뒤에 나오자 칠이 흐려져 있었다. …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다시 한 시간 뒤 슬리퍼를 끌고 나오자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 사이 골목이 어둑해져 있었다. 아직 가로등은 켜지지 않았다. 두 손에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나는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16-17쪽, 문)
마르기를 기다리며, 문을 칠한 이후 녹물이 사라진 것을 그 앞에 엉거주춤하게라도 서서 감상하는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속도는 ‘나’에게 온전히 남겨진 시간이다. 작가가 문을 드나드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이러한 진실의 파괴와 생성은 들뢰즈·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작가가 제시하는 ‘흰’이라는 감각은, 마치 잠재된 것을 기다리듯, 자신이 그 자리에 대신 태어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흰 것에 대한 다양한 감각들의 인식으로 진실의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힘들을 생성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흰』이 우리에게 전하는 ‘용기’이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작가의 말)
우리는 여전히 작가가 제시하는 흰색이 정확히 무슨 색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있는 이야기를, 순환의 메시지를 건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가 흰 것을 쓰겠다고 결심한 ‘봄’이라는 계절은 물감이 말랐다는 것을, 삶을 다시 칠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2016년에 탄생한 『흰』이라는 이야기는 2020년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를 준다. 특히나 코로나 시대에 피치 못하게 발생한 ‘고독’이 주는 불확실성에 대한 물음에 우리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2020년을 덮어낼 흰색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연필로 밑줄을 수도 없이 그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나에게 흰 책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모든 흰에게 건네는 메시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