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까? 방향을 잃었을 때, 빛은 흔히 이정표라는 상징으로 쓰인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도 않고 너무나도 빨리 변해가고 있기에, 빛은 더이상 이정표가 아닌, 쉽사리 놓쳐버리고 말 것이 되었다. 조바심이 나던 우리는 급기야 타오르는 존재가 되었다.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로지 빛만을 좇아 스스로를 태우기까지 하며 자기 자신을 등불 삼는다.
우리는 어떻게든 있는 것 없는 것을 전부 끌어 모아 우리가 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빛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스스로를 태운다. 그리고 이에 집중하다 보면, 연소를 위해 소진되어가는 것들과 타고 남은 것들에는 점점 무감각해진다. 분명히 타오름이란, 살아가기 위해 시작된 발버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목적조차 잊고 또다시 새로운 빛을 위해 계속해서 우리를 태워 나간다.
실컷 타오르고 나면, 타고 남은 공간에는 자연스레 빈 자리가 생긴다. 그렇게 해서 피어난 불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른다. 공허함은 여기서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지금의 시대에서 이러한 불확정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불안해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확실한 것만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우리는 빛을 만질 수 없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것은 빛을 위해 타고 남은 재일 뿐이다. 빛만을 좇았기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뿐, 재는 언제나 남아있었다. 이에 대한 사랑이란 감정은 시대가 지날 수록 점점 옅어져만 간다. 김연덕의 『재와 사랑의 미래』는 이 재들에 가만히 기대어 충분한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고, 사랑의 감각으로 미래를 그려낸다.
시인은 이 시집으로 「재와 사랑의 미래」라는 장시를 6부에 걸쳐 풀어나가고, 그 주변에는 단시들을 배치해 사이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공허함을 채워낸다. 주변 시들의 제목은 대부분 물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타기 위한 재료이자 타고 남은 재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렇게 이 시들은 재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보편적이고 익숙한 감각들로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또한 이 시집에는 빛과 어둠의 심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갑작스럽지도, 너무 눈부시거나 어둡지도 않다. 그래서 시를 읽는 독자는 안심하고 잠시 타오르는 것을 멈추고, 시가 전하는 감각적 사유와 사랑 안에 몸을 맡기게 된다.
1. 뜨거워지는 「긴 초들」, 발견되는 사랑
타는 냄새.
모든 것은 빛에 대한 정보의 빈약에서 비롯된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솟고 다르게 깎이는 얼굴처럼
그중 몇 개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꿈속과 꿈 밖을 오가듯 힘을 뺀다. 숨을 참는다. 다리를 뻗고 몸을 반으로 접는다. 한 시기가 지나도 끝까지 남아 커져 가는 것들에
나 자신에
대항하지 않는다.
기대 없이 불 없이
가장자리를 지우며 다가오는 호흡이 있다. 이곳과 조금 어긋나는 속도가 있다. 뒤늦게 알게 되는 단순한 사실들은 마음에 어떤 길이로 덧붙여야 적당한 걸까. 20센티미터 22센티미터 하얗게 끊어진 형태의 어둠을 무거운 촛대에 조심스럽게 꽂는다.
가져본 적 없던 손과 발이
뜨거워진다.
- 「긴 초들」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빛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빛에 대한 정보의 빈약은 다양한 환상을 자아내는데, 이 시에서 ‘나’는 그런 빛에 대해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채 대항하지 않는다. 그런 사이에 기대도 없이 불도 없이 가져본 적 없던 손과 발은 뜨거워진다. 사랑이라는 것은 빛이 없이도 충분히 온기를 지닌다. 가져본 적 없던 것을 감각한다는 것은 이제는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타오르던 ‘나’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간다. 조금 어긋나는 속도를 두려워 할 필요 없이, 뒤늦게 알게 되는 사실들은 그저 조심스럽게 덧붙이면 된다.
이 시에서는 짧은 글로 이루어진 연과 긴 글로 이루어진 연이 교차된다. 짧은 글의 연만 모아보면, “타는 냄새, 기대 없이 불 없이, 가져본 적 없던 손과 발이 / 뜨거워진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형식은 시 전체와 ‘나’의 온 몸이 대응 구조를 이루도록 해 읽는 이에게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시의 제목인 ‘초’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집에서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긴 초」라는 시를 통해 의미를 짐작해보건대, 「긴 초들」의 ‘초’는 ‘비스듬한 고독 환한 의심 가운데 하나씩 타오르던 것’, 즉 ‘나’이다. ‘나’는 「긴 초들」에서 뜨거워지는 감각을 통해 사랑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2. 「포프리」로 묶어낸 번지는 불꽃들, 주고받는 사랑
문밖에 너무 많은 삶이 있어
문을 닫았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나는
내 나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창은
완전하고 고전적인 비바람을 차단시키며
꽃집은 반쯤 죽은 채 세로로
깊은 구조를 가진다
파헤쳐진 정원 같은
작업대에는 몇 개의 가위가 있을까
피고 잠들던
각기 다른 공동체 어지러운
토양 사이를 할 수 있는 한 많이 거닐며
소유하는 상처
유리병 속 물이 자연생활의 무겁고
부드러운 소음을
산책하는 어둠을 가둘 수 있을지
놓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겨울축제 적막처럼
여러 겹으로 두려워지고
조용해지는 다발
시드는 미지의 생활에 강하며
조금씩
섞여 있는 기억들까지 제 나라로 점한다
품에서 벌써
다른 사람 손끝 다른 집
거실을 기다리는
차분히
조각나는 땅
문밖을 나선다
산 채로 내리는 비를 맞는다
줄기들의 구멍으로 어두워진 병을 보고
상처 입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 「포프리」
「긴 초들」에서 빛을 무작위로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포프리」에서는 너무 많은 삶에 대해 문을 닫는다. 「포프리」는 많은 행과 연을 통해 천천히, 단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이다. 이 시의 이러한 형식은 내 나라로의 걸음이나, 밖으로 나서는 과정, 겨울 다음의 봄이라는 계절에 대한 기대와 같은 공간적, 시간적 이동을 감각하게 하며, 충분한 준비의 표현과 사랑의 의미를 강화한다. ‘나’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내 나라에 가까워짐을 느끼고, 비바람을 차단시켜주는 창을 통해 안정감을 느낀다. 또한, ‘긴 초’들이 가지던 인상은 ‘꽃’이라는 생명으로 다시금 설명되는데, ‘재’라는 것에 주목한다면 타오르고 남은 재가 재거름이 되어 그 속에서 피어난 꽃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꽃집은 반쯤 죽어있다. 이 시에는 꽃집의 ‘안과 밖’, ‘유리병 속 물’과 ‘산 채로 내리는 비’라는 인공적인 이미지와 자연적인 이미지의 대비가 등장하는데, 반쯤 죽어있다는 것은 곧 허물어질 죽음과 삶의 경계로 작용한다. 꽃에게 있어 죽음이란 시드는 것이다. 꽃집에서 반쯤 죽어있음을 경험하고 문 밖을 나서는 꽃은 시드는 미지의 생활에 강하다. 꽃은 ‘불꽃’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 불꽃은 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가 내리는 문 밖을 나선다. 꽃다발은 주고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기를 기다리는 이 사랑은 생명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3. 재를 모아 담아낸 「유리함」, 남아있는 사랑
무언가 넣을수록 가벼워지고 아무것도 안 넣을 때 제일 무거운 이상하고 아름다운 상자가 있다. 나는 길에서 이것을 보거나 주운 적 없고 집에 들여놓은 적도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심장을 뚫고 들어온 이것이 밤이면 현란한 불빛을 찾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을 느낀다. 심장에서 방에서 멀어지려는 것을 느낀다, 속도를 참으며 눈을 감으며. 다시 눈을 뜨면 어딘가로 진입하는 모서리가 보이고 투명한 얼굴 내가 잘 아는 얼굴이 보인다. 얼어붙은 고요가 보인다. 기나긴 고요. 생각을 포기한 고요. 고요에 대한 생각을 생각에 기댄 고요를 지연시키고 지워 버리고 싶은 고요. 생동하는 빛 생동하는 어둠 속에서 떠밀려 흐르는 생각의 고요. 상자는 회전하며 밑바닥부터 무거워지고. 떠오르듯 추락하면서도 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이 감정과 이 운동이 가진 감각은 공중에서 차게 떠다니는 입체가 아닌 끝없이 느리게 이어지는 평면에 가깝습니다. 자신에게로만 향하는 헛걸음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한번 딛기 시작한 걸음을 더는 멈출 수 없고 나는 늘 나와 가까운 것을 좋아합니다. 영영 희미해진 시간을 아무것도 아니게 된 얼굴들만 좋아합니다. 어둡고 지나치고 추상적인 느낌만이 때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온갖 기계와 사랑과 수학의 목적지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는 언제부터 이 이상한 상자를 나도 모르는 청력을 갖게 된 것일까. 기대 없이 지침도 없이 네 모서리는 움직이며 깊은 곳을 찌르고 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씩 집중하면서 각진 모서리가 점점 닳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선과 선이 부딪치다 깎이는 소리 따뜻한 입술 불가능한 입구가 동시에 열리는 소리. 없는 장작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소리. 가끔 어떤 소리는 소리와 상관 없는 세부를 궁금하게 만든다. 세워 두고 질문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상자가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을지. 구리 철 나무 종이 순은 비닐 다 나쁘지 않지만 나는 이 상자를 유리 상자라 부른다. 겨우 이런 것만 내 뜻대로 할 수 있기에.
- 「유리함」
들여놓은 적도 없는 이 상자가 ‘나’의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이 대목은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갑자기 생긴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가지게 된 감각으로 인지하게 된 것인지 말이다.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감각으로만 인식되는 이 상자는 무엇일까. 시의 끝에서도 결국 상자는 끝까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온갖 기계와 수학처럼 확실한 것도 결국 추상적인 것을 목적지로 두고 있다. 그러니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 상자를 세워두고 계속해서 질문한다. 결국 이 상자가 무엇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와 가까운 것을 좋아하고 계속 궁금해 하며 질문한다는 점에서 결코 헛걸음은 아니다.
이 시는 고요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도 고요하지 않게 잔뜩 설명하고 있는 산문시이다. 이 산문시는 중간에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처럼 어미가 바뀌는데, 내 속으로 계속 걸어가며 끝없이 혼자 생각하면서도 이를 누군가에게 설명하여 해소하고 싶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많은 생각 속에서 고요함을 찾을 수록, 상자를 통해 모순적이고 이상한 감각만을 마주할 뿐이다.
‘나’는 이 상자에 대해 ‘유리 상자’라고 명명한다. ‘겨우’ 이런 것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언뜻 보면 자조적인 어조로 보이지만, 재에 대해서는 딱 이정도의 적당함이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로 인해 더이상 불확정성은 두렵지 않다.
넣을수록 가벼워지는, 아무것도 안 넣을 때 제일 무겁고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 「유리함」이라는 시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공허함이라는 감정과 맞닿아 있다. 수많은 생각 속에서 점점 내가 타들어간다고 느낄 때 열었던 이 「유리함」 속에는 적당한 양의 재와 사랑이 담겨있었다. 유리함에 재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럼 단순하게 넘겨 버린 이 남은 감정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제 단순하게 살기를 원하기보다, 우선 나의 복잡함을 사랑하고 싶다. 나는 언제나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그래서 이 복잡한 것들을 전부 끌어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복잡함을 끌어안는 적당함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이토록 모르겠는 사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에, 시인은 ‘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한껏 소진된 나는, ‘모른다’는 것을 괜찮다고 말해주는 아름다운 이 시의 언어에 가만히 기대어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재에 담긴 온기를 간과하지 않고, 이 감각을 놓지 않는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느껴진다.
모르는 것을 계속 궁금해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걸로 되었다. 무엇보다 감각이란 것이 다시금 중요해진 시대이다. 우리는 타오르는 것을 멈추고 여지껏 우리가 몰라 보았던 재를 마음껏 감각해도 괜찮다.
재에게도 미래가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