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라면서 서운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다. 아기 때의 귀여웠던 모습이 점차 사라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게 서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편으로는 커갈수록 점점 말도 통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니까 좋기도 하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우리 부부는 트럼프 카드 게임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카드게임이라고는 카드 뒤집기 정도만 가능했었는데 자라면서 함께 즐기는 게임의 종류가 늘어났다. 도둑잡기나 원 카드부터 시작해서 요즘 들어서는 세븐 포커, 텍사스 홀덤같은 포커게임에 푹 빠졌다.
원 카드는 둘째가 일곱 살 때부터 가르쳐 줬는데 이제는 제법 실력이 늘었다. 어느 날엔 둘째와 둘이서 게임을 했는데 방심했는지 연거푸 다섯 번이나 지고 말았다. 그다음부터는 둘만 하면 재미없다는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일 대 일 게임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한테 한 번도 아니고 연속으로 다섯 번이나 지다니 엄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원 카드가 지겨워질 때쯤 포커를 가르쳐주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인터넷으로 포커의 카드 조합을 확인해가며 투 페어, 트리플, 스트레이트, 풀 하우스 등의 용어를 새로 익혔다. 포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포커칩이 마땅치 않아 10원짜리 동전이나 바둑돌을 쌓아놓곤 했다. 첫째는 집에서 하던 포커에 재미를 느꼈는지 친구들과 하겠다고 한동안 무거운 바둑돌을 책가방에 넣고 다녔다. 겨우 열 살 남짓 된 아이들이 놀이터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바둑돌로 배팅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좀 웃기다.
아이들이 포커 게임에 흥미를 보이자 남편은 내친 김에 포커용 칩까지 주문했다. 007 가방 같이 생긴 반짝이는 은색 케이스에 든 포커칩은 국제 대회 규격과 똑같이 만들어져서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알록달록한 칩을 쌓아놓고 담요를 깐 테이블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저마다의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우리 집에선 이제 익숙한 모습이다.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무슨 도박을 가르치냐고 탓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에게 포커를 가르치는 의도는 명확하다. 게임의 재미를 즐기되 그 이상의 선은 넘지 않는 것. 겨우 플라스틱 칩을 몇 개 잃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속상해하고 때로는 울먹이기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을 달래며
"그것 봐.. 이렇게 가짜 돈을 잃는 것도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만약에 진짜 돈이었으면 얼마나 더 속상했겠니? 그러니까 어른되서도 절대로 도박 같은 거 하면 안 돼"라고 말해준다.
카드 패를 섞고 나눠주는 딜러 역할은 주로 남편 담당이다. 나는 어쩌다 가끔 둘째가 졸라대면 어렸을 때 언뜻 보면 화려해 보이는 리플 셔플 기술을 보여준다. 많이 어설픈 솜씨지만 둘째는 볼 때마다
"엄마 대단해요!"라고 외친다. 초등학교 때 사촌오빠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려 혼자 밤새워 연습한 게 헛되지 않은 것 같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아무리 카드 게임을 재미로 하더라도 이기거나 지거나 별 차이가 없으면 아이들은 흥미를 잃을 수 있다. 그래서 한동안은 게임이 끝날 때마다 점수를 매겨서 그날의 최종 승자에게 주말 식사 메뉴 결정권을 주었다. 주말엔 나도 밥 하기 싫을 때가 있으니 아이들이 원하는 맛있는 메뉴를 먹으면 일석이조다.
요즘엔 트럼프 카드 게임 외에 다른 게임도 자주 하는 편이기 때문에 다음에 무슨 게임을 할지 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을 이기는 사람이 다음 게임의 종목을 정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조건이라면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게임을 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이기려 든다.
최근에는 세븐포커와 비슷한 텍사스 홀덤을 새로 시작했다. 텍사스 홀덤은 세븐 포커와 비슷하지만 카드를 나눠주는 방식이 다르다. 세븐 포커가 히든카드 3과 보이는 카드 4장의 조합으로 승패를 결정한다면 텍사스 홀덤은 히든카드가 2장이고 공통으로 깔려있는 5장의 카드의 조합으로 칩을 건다. 카드의 운이 따라야 함은 물론, 자신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따져 배팅을 잘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우리 집에서 텍사스 홀덤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의외로 막내다. 카드 운이 잘 따르는 건지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잘 아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
처음에는 가족끼리 카드놀이하는데 포커칩까지 사는 건 좀 지나친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게임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준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슨 가족 도박단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포커든 윷놀이든 고스톱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 덧붙여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에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장성한 자식과 노부부가 함께 카드놀이하는 모습은 조금 낯설면서도 화목해 보여 좋았다. 아이들이 다 자란 후 지금을 추억하면서 둘러앉아 색색의 칩을 쌓아놓고 포커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