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 딱지

ft. 손목터널 증후군

by apricot

저녁식사를 마치고 잘 놀던 둘째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병뚜껑 펴준댔는데.. 아빠는 오늘도 늦게오고.. 내 병뚜껑은 안 펴주고...엉엉"


얼마 전 남편이 옛생각이 났는지 맥주 병뚜껑 한 개를 망치로 두드려 펴서 첫째한테 주었던 일이 화근이었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렇게 병뚜껑을 펴서 딱지로 가지고 놀았는데 완전히 납작하게 펴려고 기찻길에 놓았다가 어른들한테 혼나기도 했었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첫째는 아빠의 추억이 담긴 병뚜껑 딱지를 가지고 놀다가 자기 방에 고이 보관했다. 그때는 별 말 없던 둘째는 문득 서러웠던지 자기 것도 만들어달라고 며칠 전부터 졸라대기 시작했다. 남편은 늦은 시간 망치질을 하면 곤란하니까 일찍 퇴근하는 날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느 날은 깜빡 잊어서, 어느 날은 늦게 퇴근해서 미루고 미뤄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해주마 약속했던 오늘이 또 하필 야근이라 둘째는 결국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눈물 뚝 그치면 엄마가 펴줄께."


그까짓 병뚜껑쯤 남편 없어도 혼자 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비장하게 망치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지난 가을 손목터널 증후군으로 한 달 넘게 고생한 기억이 있지만 애가 저렇게 우는데 그정도 못해줄까 싶었다.

처음엔 병뚜껑 같은 건 대충 한 두번 망치로 두드리면 펴질줄 알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황금빛 클라우드 병뚜껑은 대체 무슨 고강도 특수 금속으로 만든건지 나의 어설픈 망치질 따위엔 꿈쩍도 않았다. 살살 두드려도 보고 좀 힘을 줘서 두드려도 봤지만 아무리 해도 소용없었다.

늦은 저녁 망치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아랫집에서 시끄러울 것 같았다. 손목도 슬슬 아파왔다. 그냥 첫째를 꼬드겨서 동생 하나 주라 하고 나중에 새로 만들어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으론 둘째한테 큰소리 쳤는데 그래도 해보는데까지는 해봐야지 오기가 생겼다.

망치로 두드리는 것 말고 혹시 다른 방법이 있나 싶어 검색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병뚜껑 펴는 법, 병뚜껑 딱지 등을 검색해 봤지만 망치로 펴는 것 말고 달리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어렸을 때도 안 가지고 놀았던 병뚜껑 딱지 하나 만들겠다고 이 늦은 시간에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기 딱지를 기다리는 아이를 생각하면 차마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구함을 뒤져 롱노우즈를 찾아내 이태리 장인이 한땀한땀 수놓듯 뚜껑 주름 하나 하나 눌러 펴기 시작했다. 망치로 몇번 두드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깃든, 말 그대로의 수공예품이었다. 미적감각을 총동원해 나름의 절제미와 균형미까지 갖춘 병뚜껑 딱지가 그렇게 내 손에서 만들졌다. 물론 오른쪽 손목의 시큰거림은 덤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겨우 완성한 병뚜껑 딱지를 보여주니 둘째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엄마, 근데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요? 망치 소리도 안 났는데..저도 알려주세요. 꼭 알고 싶어요."


롱노우즈로 만들었다고 하면 틀림없이 자기도 직접 해보겠다고 할 기세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이거? 엄마가 장갑끼고 손으로 폈지. 엄마 힘 세지?"

"우와... 정말요? 엄마 짱이다. 아빠보다 더 힘세네요? 엄마 팔에 근육 엄청 많나봐요."

"누나! 엄마가 내꺼 병뚜껑 펴줬어. 누나꺼보다 더 납작하게 잘 펴졌어."


첫째는 자기 것이랑 이리저리 비교하더니 입을 삐쭉거렸다.


"정말이네.. 내거보다 더 납작하잖아? 엄마, 내거도 다시 펴 줘요.."

"아..그건 곤란해. 엄마가 손으로 한거라 아파서 더는 못해.. "

"엄마가 손으로 폈다고요? 이걸요? 정말요? 그럴리가.. 에이.. 아닐 것 같은데.."


둘째보다 세살이 많은 첫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끝까지 모른 척 잡아뗐다.어쨌든 아이는 기뻐했고, 나의 임무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있다. 조잘조잘 자기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둘째가 내일 유치원 선생님에게 "선생님, 우리 엄마 힘 진짜 쎄요. 병뚜껑을 글쎄... 이~렇게 손으로 납작하게 폈다니까요" 라고 말할까봐 조금 두렵긴 하다. 내가 무슨 차력이라도 하는 줄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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