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현상 뒤에는 반드시 원인이 존재 한다는 믿음, 이것이 바로 인과율의 근본 원리입니다.
태양이 뜨면 하루가 시작되고, 봄 다음에는 여름이 오고,,,
그런데 막상 이러한 인과율이 자연법칙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것 같은데 인간의 삶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미묘한 변수들이 이 단순한 법칙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인과율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또 아니면 인과율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믿음이 착각일까요?
어릴 적부터 쌓아온 경험은 우리가 선택한 행동에 대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막상 우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결과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 보았던 인과율이 인간의 삶 속에서는 불완전하게 작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원인과 결과가 정확하게 실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미묘한 틈새를 지금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을 보면, 우리는 너무나 유명한 f=m*a (힘=질량*중력가속도) 라는 정의를 잘 알 것입니다.
운동에 대한 뉴턴의 고전역학의 이 정의는 한마디로 질량과 가속도, 방향만 알면 미래를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미립자 세계를 들여다보면 고전역학이 힘을 잃게 됩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보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고 정의합니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됩니다.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는 한마디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과학적 견해에 대한 의미는 이전에는 인과에 대해서 명확한 진리라 생각했으나, 현대 과학은 인과에 대해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이야기하고, “A라는 원인이 특정 확률로 B라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이러한 비결정론은 완전한 무질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이러한 확률적 규칙을 설명하고 있으며, 다르게 이야기하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규칙 아래에서 확률적으로 일어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과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 규칙을 찾지 못해서 라는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자역학에서 인과율은 얽힘 입자의 상호작용처럼 특정한 사건들은 시간 순서에 의존하지 않고 동시에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고, 양자중첩 이론에 나오는 관찰자 효과처럼 상호작용과 의존성에 대한 고찰은 인과율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과가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를 따른다고 믿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당연한 개념마저 무너뜨립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서 상대적입니다. 특정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다른 관점에서는 뒤바뀌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란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우리가 객관적인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주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에서 얻게 되는 시사점처럼 우리가 인과율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변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일상의 인간의 삶 속에도 고전역학과 같은 필연적 인과가 존재하지만 양자역학처럼 우연성과 확률적 인과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세계의 인과율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처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소들로 인해서 우리가 인과율의 원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A라는 선한 행위를 하면 예상하는 B만큼의 결과가 따라와야 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수많은 상호작용하는 변수들로 인해서 그 결과가 우리의 예측을 빗나가기 일쑤입니다. 예측이 빗나갔다고 해서 인과율이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니겠죠. 다만 우리가 인과율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를 뿐이지,,,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종종 인과관계를 단순화하거나 인지편향으로 잘못 연결 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를 인과적 이라고 오해를 하거나 실제 인과관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때 인과율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아울러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작은 원인이 거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듯이 작은 변수들이 비선형적으로 작용하여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이러한 것이 마치 인과율이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게 합니다.
인과율을 “A만큼 좋은 일을 하면 B만큼의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 아니면 반대로 B만큼의 나쁜 일을 하면 B만큼의 나쁜 일이 일어나야 한다.” 라는 인간의 윤리도덕률에 투영시켜 자연의 법칙인 인과율이 인간의 법칙인 윤리도덕률을 따라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과율은 우주의 자연법칙이지 인간의 윤리도덕 법칙이 아닙니다.
아울러 인과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 중 종종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인의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행동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결정은 사실 무의식적 이거나 뇌의 속임수, 환경적 요인의 결정을 많이 받습니다.
이렇게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일들이 외부요인에 의해서 좌지우지된 것이라면 우리가 믿는 인과율이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과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세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고, 인과율은 단순히 하나의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과 삶을 이해하려는 방식 그 자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붓다는 이러한 인과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붓다가 말하는 인과율은 조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율과는 다른 의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과율’에 대한 몰이해로
내가 착한 일을 했으니깐 복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당장 그렇지 못하다고 원망을 하면서 괴로움이 쌓이고,
저 사람은 악한 일을 했으니깐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돈을 잘 번다고 세상이 공평치 않다고 원망을 하면서 괴로움에 쌓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이러한 정의는 현생은 아니더라도 다음 생에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기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러한 사고가 어쩌면 우리 사회를 버티는 윤리도덕에 대한 믿음이니깐요.
그렇지만 ‘인과율’에 대한 집착으로 위와 같이 괴로움이 쌓이면 이 또한 인과율에 대한 바른 이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A 라는 원인의 생각,말,행동을 했으니 그에 합당한 B 라는 결과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것을 ‘에고적 인과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나’라는 개체의 연속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에 ‘아상’ ‘에고’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움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100만큼 착한 일을 했는데 50만큼 혜택이 따라오거나, 착한 일을 했는데 지금 당장 불행이 없어지지 않거나 하면 원망이 쌓이죠)
붓다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나’라는 ‘아상’에 대한 집착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러한 ‘아상’을 근본 바탕으로 한 ‘에고적 인과율’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붓다가 말하는 인과율은 이러한 ‘에고적 인과율’의 개념이 아닙니다.
A 와 B 가 상호작용하여 존재/삶이 만들어진다고 보는 ‘연기적 인과율’이 붓다가 말하는 인과율입니다.
(A와 B가 특정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호 작용하여 ‘나’라는 ‘아상’도 생기고 존재도 만들어지고 삶도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용어로 설명하면 안/이/비/설/신/의 작용이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과 상호작용하여 삶, 존재가 나타난다는 ’12입처’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율’ 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이 ‘연기적 인과율’로 계속 창조되고 있습니다.
‘연기적 인과율’이 없다면 우리 삶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 속에서는 ‘연기적 인과율’이 100%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죠.
이러한 ‘연기적 인과율’은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기 이전 자리입니다. ‘연기적 인과율’의 결과로 ‘나’라는 아상이 만들어지니깐요.
우리는 머리로는 ‘무아’를 깨닫고 ‘아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겠다고 하지만,
‘인과율’ 하나만 보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계속 ‘나’라는 ‘아상’에 집착하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상’을 내려놓기가 힘든가 봅니다.
그리고 붓다는 매 순간 하는 우리의 생각,행동,말이 카르마(업)로 저장이 되어 반드시 그 결과가 따라온다고 합니다.
유식사상에서는 ‘아뢰야식’에 이러한 업이 모두 ‘종자’로 저장이 되어 종자가 이듬해 봄에 다시 식물로 자라듯, 우리의 업은 윤회하는 다음 생의 종자가 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윤회로 인과율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생에서 다음 생이 아니라 매 순간 윤회하면서 인과율이 100% 실현되고 있다고 붓다는 말합니다.
이때 인과율은 ‘에고적 인과율’이 아니라 ‘연기적 인과율’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 챙김에 대한 통찰력이 조금씩 생기면 이러한 ‘인과율’에 대한 이해는,
결국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삶을 양심에 맞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