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유행했던 단어가 있다. 뜻밖의 여정. 영화 하나가 개봉하며 따라온 인터넷 속 유행어는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친구들의 입 밖에 나오곤 했다. 교실에 돌아가다 친구에게 잡혀 매점으로 향할 때나 쓰던 뜻밖의 여정. 한때 반짝 유행하고 안 쓰이는 듯했던 말은 정말 뜬금없는 곳에서 뜻밖의 일을 만나며 또 한 번 내 인생에 나타났다.
유럽에서 장장 6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D-DAY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암스테르담을 거쳐 인천으로 오는 비행인데, 난생처음 비행기 환승이라는 걸 해야 했다. 더군다나 경유 시간이 겨우 1시간밖에 안 되어 바짝 긴장해 있던 차였다. 짐을 찾지 않아도 되니 서둘러 환승 게이트로 가기만 하면 된다며 머릿속으로 되뇄다.
긴장한 내 마음을 아는 건지, 깜깜한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에서 이륙 준비를 하는 비행기 위로 후드득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조그만 창문을 두드리는 겨울 빗소리는 여행을 떠나오던 날을 추억하게 했다. 유럽의 첫인상은 푸른색 하늘과 초록색 잎사귀의 여름이었는데, 어느덧 패딩을 입고 회색 구름이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귀국하고 있었다. 아마 한국에는 눈이 내리고 있겠지. 왜 더 알차게 놀지 못했나, 피곤하다며 거절했던 약속들이 떠올라 아쉬웠다. 다시 환한 여름으로 돌아간다면 잠을 줄여서라도 더 많이 돌아다녔을 텐데. 즐거웠던 여행의 마지막 모습이 어두운 공항 위로 내리는 비라니.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가족은 보고 싶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아. 더 있게 해 줘! 행복했던 기억들과 약간의 아쉬운 마음을 돌아보며 감상에 잠겨 있는 사이, 빗소리 틈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움직여야 할 비행기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기내 방송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기내가 조용해졌다. 악천후로 비행이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조용해진 게 무색하게도 비행기 안은 다시 한번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촉촉하게 감상에 젖어 볼 예사로운 비가 아니었나. 떠나기 싫다고 했던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건지, 그냥 날 여기 붙여놓을 셈이다. 이미 이륙 시간은 지났다. 앞으로 약 2시간 뒤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가 뜰 것이다, 그것도 나 없이!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하는 승객들이 많은지, 기내 방송은 연신 환승 게이트를 알려주고 있었다. 헬싱키로 가는 사람은 몇 번 게이트, 홍콩으로 가는 사람은 몇 번 게이트, LA로 가는 사람은 몇 번 게이트. 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의 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인상을 오만상 쓰고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도 없어 뵈는 어리바리한 동양인 여자가 안쓰러웠는지, 옆자리에 앉아 이런 상황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양 여유롭게 신문을 읽던 한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의 이름은 Elmar, 엘마르 씨였다.
내가 지금 타고 있고, 또 갈아탈 인천행 비행기는 모두 네덜란드 항공사인 KLM 비행기였는데, 우연찮게도 엘마르 씨는 KLM 직원이라고 했다. 그는 내 사정을 듣더니, 혹시 경유 비행기를 놓칠 경우 항공사에서 다 배상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날 달랬다. 그는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하면 항공사 카운터로 안내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가 사원증까지 보여주며 날 달래는 데에는 겨우 10분이 걸렸고 한껏 미뤄진 비행기가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두어 시간 동안 우리는 내가 여행한 유럽, 그가 사는 유럽에 관해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하늘 위에서 신나게 대화하고 있을 때, 결국 인천행 비행기는 나 없이 이륙해 버렸다.
날 태워줄 비행기가 떠난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했다. 계획에도 없던 네덜란드 도장이 여권에 흔적을 남겼다. 엘마르 씨는 자국민 심사대를 초고속으로 통과한 뒤 짐 찾는 곳에서 날 맞이해 줬다. 그는 찾을 짐이 없는데도 말이다. 약속대로 항공사 카운터에 데려다주었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직원과 영어로 이야기하며(그도, 항공사 직원도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 내일 항공편, 호텔, 식비까지 받아냈다. 그러고 상황을 업데이트해 달라며 내 이메일 주소를 받더니 홀연히 떠나버렸다. 내 손에 쥐어진 새로운 항공권은 오늘 내가 타야 했던 비행기와 같은 시간,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앞으로 진짜 진짜 유럽을 떠나기까지 23시간. 난 뜻밖의 하루를 얻었다. 마침, 홀라당 집에 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잘됐다. 파리에서 내린 우중충한 비는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비였다.떠나기 아쉽다 했더니 정말 하루를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항공사에서 제공한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한 일은 일기장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여행 기간 내내 쓰는 둥 마는 둥 했던 일기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앞뒤로 두 장을 꽉 채워가며 손으로 떠들었다. 긴 글을 쓰느라 손목이 뻐근했고, 엎드려 적느라 허리까지 삐그덕거렸다. 하지만 그날 내가 느낀 당황과 뜻밖에 만난 설렘은 그 종이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계획에도 없던 DAY+1, 집을 떠나 하루 더 머물 수 있다면 우린 뭘 해야 할까.
국제 우주 정거장의 화장실 배관 하드웨어를 교체 중인 두 명의 우주인 /NASA.
2024년 6월 우주인 부치 윌모어(Butch Wilmore)와 수니 윌리엄스(Suni Williams)는 우주로 떠났다. 그들 역시 뜻밖의 DAY+1을 맞이했다.
두 명의 우주인이 우주로 간 이유는 새로운 모델의 우주선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생긴 민간 우주 기업들은 최근 들어 이제껏 개발한 우주선들을 시험하고, 우주 관광 상품들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비행기를 제조하는 기업으로 유명한 '보잉'사 역시 우주 산업에 뛰어들며 최근 '스타라이너' 우주선을 선보였다. 부치 윌모어와 수니 윌리엄스는 스타라이너의 시험 비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번 테스트를 통과하면 스타라이너가 정기적으로 지구와 우주를 오가는 비행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하지만 로켓을 타고 국제 우주 정거장으로 향한 이 우주선에서 문제점이 하나둘 발생했다. 일단 국제 우주 정거장과 도킹하기 전, 헬륨 가스가 누출됐다. 우주선의 반응 제어 추진기 역시 사소한 문제들을 일으켰다. 몇 주간 우주와 지상에서 추가 테스트가 이루어졌고, 기나긴 기관 검토 끝에 NASA는 두 우주인을 스타라이너에 태우지 않기로 했다.호기롭게 두 명의 사람을 우주로 태워 간 스타라이너는 텅 빈채 지구로 귀환했다. 일주일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부치 윌모어와 수니 윌리엄스의 귀환은 미루고 미뤄지다 결국 돌아올 날짜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타고 갈 우주선을 지구로 내려보낸 뒤, 두 명의 우주인은 뜻밖에 만난 날들을 아주 바쁘게 보냈다. 이미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실험 활동을 하고 있던 crew-8 우주선에 두 명의 우주인이 탈 비상 좌석을 추가했다. -국제 우주 정거장에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우주 정거장에는 체류 인원수만큼의 비상 탈출 좌석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주선 유지 보수 임무는 덤이 아닌 필수다. 한정된 자원의 우주에서 놀고먹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원이 국제 우주 정거장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에 기여해야 한다. 그래서 두 우주인은 화장실을 고쳤다. 이미 여러 차례 우주 정거장을 오가며 미션을 수행했던 베테랑 우주인들은 뜻밖의 날에 익숙한 임무를 하며 일상을 만들어 나갔다.
스타라이너가 지구로 다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 우주 정거장엔 crew-9가도착했다. 우주선의 네 좌석 중 두 자리는 빈 상태였다. 돌아갈 우주선을 잃은, 부치 윌모어와 수니 윌리엄스의 자리다. 우주인들은 crew-8에 욱여넣었던 좌석 두 개를 해체하고, 정식으로 crew-9에 합류했다. 앞으로 이 둘은 뜻밖의 날들을 넘어 crew-9으로서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과학 실험, 정거장 유지 등 함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지구로 돌아오는 건 crew-9 임무가 마무리되는 2025년 2월이다. 일주일로 계획되었던 우주여행은 뜻밖의 8개월을 만나게 되었다. 뜻밖의 여정. 피할 수 없다면 할 일을 하자. 일기장을 펼치고, 담고 싶은 기억을 쓰고, 비상 탈출 좌석을 만들고, 화장실을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