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노을
"부서질지도 모르지만, 일단 멋집니다!"
천문학 커뮤니티가 들썩이고 있다. 쯔진산-아틀라스 혜성의 사진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 별 사진만 올리던 천체 사진가들이 '드디어 혜성을 잡았다!'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슬며시 관심이 간다. 오늘이라도 혜성 헌팅을 나가 봐야 하나?
혜성을 보면 떠오르는 물건이 하나 있다. 내가 다니는 복싱장의 그 얇디얇은 수건 말이다. 너무 얄팍해진 탓에 물을 흡수하는 기능 따위는 퇴화돼 버렸다. 샤워를 한 후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는 건 복싱장 수건으로 하나 내 손으로 하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저 도구를 사용하며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의 책임감으로 수건을 집어 든다.
나는 매번 복싱장 수건을 집을 때마다 이 종잇장 같은 수건의 전성기 시절을 상상한다. 두툼하고 짙은 남색의 수건 군은 단 한 장으로도 샤워 후의 모든 물기를 말끔하게 흡수한다. 아주 능숙하고 탄탄한 특수부대원 같다. 하루에만 백여 명이 오가는 체육관에서 그는 인간들의 땀과 물을 동시에 처리하고, 세탁기 안에서는 뱅글뱅글 육탄전을 벌이며 힘겨운 싸움까지 치른다. 그리곤 다시 체육관 수건 보관함으로 돌아와 다음 임무를 준비한다. 그렇게 5년쯤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단련했을 것이다. 그 결과 수건은 수세미 같은 몸을 얻었고, 흡수력 대신 방수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참 기가 막힌 변화다.
수건이 이토록 얇아진 건 아마도 건조기 때문일 것이다. 북어는 확 트인 바닷가에서 시원한 해풍에 말려지기라도 하지, 좁은 통에 갇혀 뜨거운 바람을 맞는 수건은 매일 고문을 당하는 셈이다. 그렇게 수건에 붙어 있던 섬유들은 하나둘 불지옥 탈출 작전을 감행했고, 끝내 말라 비틀어진게 아닐까?
혜성도 복싱장 수건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혜성은 본래 우주의 떠돌이 얼음 덩어리다. 평소엔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눈사람 몸통 같지만, 태양에 가까워지면 화려하게 변신한다. 태양의 열기에 의해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멋진 꼬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멋짐이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열기와 중력을 이기지 못하면 혜성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그래서 요즘 올라오는 사진들이 어쩌면 혜성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긴장감이 든다.
혜성은 점차 어두워질 겁니다.
태양을 돌아 점점 멀어져 가는 혜성. 그 소식에 나는 서둘러 천문대 관측실로 향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혜성이 지구 가까이 오는 데 8만 년이 걸린다. 사실상, 내 생애 마지막으로 쯔진산-아틀라스 혜성을 찍을 기회다.
관측실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DSLR의 조리개와 감도, 노출 시간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분주히 촬영을 시도했다. 아직 해가 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이 밝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탐색해야했다. 하지만 혜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꼬리도, 밝은 핵도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혜성이 그새 어두워진 걸까? 하늘이 너무 밝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 실력이 부족한 걸까?' 스스로 의심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결국 허탈해진 마음에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노을이 강렬하게 나를 감쌌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한마디를 속삭였다.
"나야, 노을."
노을은 넷플릭스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요리사들 처럼 다채롭게 등장했다. 하늘에 금빛, 자줏빛, 오렌지색이 교차하는데, 마치 물감을 곁들인 듯 온 세상이 그 색으로 번져갔다. 나는 노을을 볼때 색의 입힘 정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오늘 하늘은 색의 입힘 정도가 완벽했고, 구름 한 점 없는 이븐한 하늘에 입이 떡 벌어졌다. 최고의 노을을 뽑는 서바이벌이 있다면 쉽게 이 멘트를 들을거다. 생존하셨습니다.
<흑백요리사>에서는 심사위원이 눈을 가리고 참가자들의 요리를 평가하는 라운드가 있다. 요리사의 명성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맛과 향, 식감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덕분에 무명 요리사들이 유명 셰프들을 이기는 기적 같은 일이 종종 벌어진다. 가치는 종종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나도 혜성이라는 유명세에 가려, 정작 노을을 지나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혜성을 찍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오늘을 끝내주는 노을을 본 날로 기억하고 싶다. 혜성을 찾지 못한 날로 기억되는 것 보다 훨씬 운치 있으니까.
복싱장에서 땀을 흘리고 나서 샤워를 하고 나올 때, 내가 떠올리는 건 닳아버린 수건이 아니라, 말끔히 땀을 씼어낸 개운함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종종 잃은 것들을 헤아리느라, 손에 쥔 것들을 놓치곤 한다. 소중한 것에 더 마음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적어도 오늘은, 오늘을 노을로 기억하고 싶다.
[혜성 사진 제공_글 상단]
ⓒPeter cafuego
촬영 날짜: 2024년 10월 2일
카메라 정보: Nikon D750
촬영 장소: 호주 Donald
라이선스 : 일부 권리 보호(링크)
[혜성 사진 제공_글 중간]
ⓒBrett Spangler
촬영 날짜: 2024년 10월 13일
카메라 정보: Sony ILCE-7CM2
라이선스: 일부 권리 보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