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신나지 않은, 신나리
신나리의 남편은 이혼 후에 북한산 기슭 등산로에서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
누구든 자신의 시신을 발견하면 치워달라는 부탁과 함께 두 딸이 보고 싶다는 꾸깃한 쪽지 한 장을 남겼다.
어느 해인가 마을에 많은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 가까이에 세워둔 차가 눈 속에 파묻혀 지붕도 보이지 않았다.
연일 내린 눈에 마을 외길은 사라졌고, 멀리 점점이 박혀 있던 이웃집들도 겨우 흔적만 남아 있었다.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면 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루만 지나면 마을 이장이 포클레인으로 치워줄 텐데 난 그 하루를 참기 힘들었다.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겨우 헤쳐가며 신나리의 산장 앞을 지날 때, 자그마한 체구에 야무진 그녀가 우리 차를 세웠다.
"상남으로 가지 말고 인제로 돌아가."
오랫동안 도시티를 벗지 못하고, 산속살이가 어설펐던 나를 걱정해 준 고마운 친구였다.
신나리가 손에 몇 푼 쥐지도 못하고 마을을 떠난 건 그로부터 오래 지나 서다.
강원도 영월, 충북 단양과 접경인 경북 영주 김삿갓마을로 이사했다.
댐공사로 생긴 마을 보상금 처리를 두고 술 좋아하는 남편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입방아에 오르내린 게 화근이었다.
신나리는 보상금에 관심이 많았던 남편과는 달리 잰 발걸음으로 아무 말 없이 집안일만 똑 부러지게 해냈었다.
하지만 그녀도 말없이 견뎌내느라 많이 힘들었었나 보다.
동네 다른 동갑 친구와 함께 원주터미널 근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눈에 띄게 가늘어진 작은 몸과 수척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였다.
위암 판정을 받고 잘 먹지도 못하고 지냈지만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터미널 옆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턱이
불안해 보였다.
그 낮은 턱 하나를 넘지 못하고 그녀는 흔들흔들 바닥에 쓰러졌다.
함께 있던 우리도 쓰러졌다.
몇 년 후 신나리는 다시 춘천으로 이사했다.
춘천에서도 그녀 남편의 알코올중독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내게 그녀는 영주에서 보낸 전쟁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몇 년에 한 번씩 혼자 나무집을 지어 팔아가며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는 남편은 날이 갈수록 알코올중독이 심해졌다.
그날도 그는 아는 지인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고 많이 취해 있었다.
시끌벅적 어수선한 술상에서 슬그머니 일어난 그는 종이에 쌓여있는 뭔가를 풀어헤치더니 순식간에 일행 중 한 명에게 덤벼들었다.
그건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닌 작은 칼이었다.
즐거운 술자리는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가 빼어든 칼은 일행 중 한 명의 귀 뒷머리를 스쳐나갔고 사방은 아비규환 피바다로 물들었다.
같이 있던 둘째 딸이 그걸 다 보았다고 신나리는 흐느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남편은 죽어버린다며 미친 듯이 근처 계곡물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신나리는 그를 끌어내려고 정신없이 뒤쫓아가는데 누군가 자기 팔을 잡아당겼다.
가까이 사는 친한 동네 언니였다.
"그냥 내버려 둬."
그냥 죽게 내버려도란다.
신나리의 남편은 그 난리통에도 살아났다.
그녀는 딸들과 날 봐서 살려달라며 피해자에게 무릎 꿇고 빌며 매달려 사정했다.
치료비 500만 원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신나리는 또 울었다.
수많은 비슷한 일들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남편을 알코올중독 병원에 입원시켰다.
나가게 해 달라는 남편의 전화가 오면 마음이 흔들렸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악몽은 반복되었다.
몇 년을 더 버틴 후 신나리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녀의 남편은 신나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며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줬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녀를 만나고 춘천서 돌아온 지 얼마 후 신나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무에 목을 맨 남편이 북한산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그래, 이제야 끝났구나!
매년 향을 피우고 제사상을 차려주는 그녀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