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글쓰기
작년 12월부터 매달 한 번씩 여행을 다니고 있다. 2월에는 3번째 여행으로 군산에 다녀왔다. 군산에 가서 귀하고 맛있는 음식들도 먹고, 일본식으로 지어진 가옥과 절도 둘러보고, 이성당에 줄을 서 단팥빵도 맛있게 해치웠다. 무엇보다도 '조용한 흥분색'이라는 책방에 다녀온 게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도서문화공간 조용한 흥분색에는 다양한 책들 사이로 체험 공간이 군데군데 있어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책방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사실 남편은 책 읽기를 어려워한다. 그런데도 나름대로 그 공간에 여기저기 참여하더니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며 추천까지 해줬다. 한 꼭지를 읽어보고 마음에 쏙 들어 바로 구입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책을 거의 인터넷으로 주문했지 이렇게 서점이라는 공간에 와서 천천히 둘러보다 골라서 산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푹 빠져 몰입해 본 것도 얼마만이었는지... 참 조용한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짜릿하게 흥분되는 꽉 찬 시간이었다.
사실 최근 2~3달의 시간이 어찌나 느리게 흘렀는지 모른다. 속이 타고 아득한 느낌에 매일 좌절하고도 또 좌절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느낀 괴로운 나날이었다. 12월 계류유산을 겪은 후 슬픔에서 간신히 뭍으로 올라올 무렵, 1.6cm 크기 자궁근종을 진단받았다. 생리통도 없었고 월경주기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정했던 나였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해 봤지만 2.1cm까지 짧은 시간 급격히 자라나는 속도에 항복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만약 정말 근종이 맞다면 수술 이후 최소 3개월, 길게는 6개월까지도 임신 시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술 결정이 더 어려웠다.
2달 만에 다시 차가운 수술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또 한 번 마취에서 깨어났을 땐 엉엉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편은 내가 너무 아파서 울고 있는 줄 알았다지만 사실은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해서 터진 눈물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냥 다 감사합니다...
내가 무사히 깨어나서, 남편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마주할 수 있어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두려움에 떠는 내 손을 잡아 주시던 간호사 선생님들의 따뜻함이 함께 했다는 게, 그냥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감격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조직을 보니 근종이 아닌 용종일 것 같다고 하셨다. 대신 용종은 3개월 이내에도 재발률이 20~30% 정도로 높기 때문에 그전에 빨리 임신을 성공시키는 게 좋겠다는 소견과 함께. 수술 후 호르몬제를 먹으며 3개월이 될지, 6개월이 될지 모를 시간을 견딜 각오를 했던 우리 부부에게 용종이란 소식이 어찌나 반갑게 들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1주일 뒤 조직검사 결과는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근종도, 용종도 아닌 태반 조직이었다고... 호르몬제도, 재발 위험에서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나는 비로소 자유를 찾은 것처럼 기뻤다.
그런 시간을 보냈기에 서점에서의 평화로운 순간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군산에서 장자도라는 섬에도 들어갔다 왔는데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불던지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람이 너무 세!!!” 아무리 외쳐도 바람에 파묻혀 목소리가 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 부부는 인적이 드문 해변가에 차를 세운 뒤 작정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간 묵은 감정을 다 실어 바람에 날려 보내리라는 다짐으로. 꽥꽥 소리만 지르는 내게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보라며 남편은 멋지게 시범을 보여줬다. 둘이 깔깔거리며 숨이 찰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났더니 가슴이 두근거렸고, 매섭게만 느껴졌던 바람은 어느새 시원하고 개운해져 있었다.
군산의 바닷바람이 내 마음속 황량했던 겨울을 다 쓸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