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끄면 보이는 세상

by 사월

최근 이사를 했다. 대전에서 30평형의 집에 살다가 둘이서 사는데 이렇게 큰 공간까지는 필요 없는 것 같고, 특히 천안에 와서는 주말 부부가 될 텐데 좀 줄어들어도 괜찮겠지 싶어 20평대의 아파트로 들어왔었다. 우리 집 가구며 가전들이 모두 30평형대에 맞춰져 있었다는 건 생각지 못한 채로. 집을 줄여서 이사와 보니 우리 집에 이렇게나 물건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공간이 꽉꽉 들어찼다. 그렇게 2년 여를 살다가 기쁨이가 생기며 이사를 해야겠다 생각하던 참에 집주인의 사정도 생겨서 예상보다 4~5개월 정도 빨리 이사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사를 앞두고 꼼꼼히 계획해서 빠짐없이 처리했을 텐데, 한의원 일에, 체력도 따라주지 않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일처리를 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결국 이사 전날 밤이 되어서야 생각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인터넷 이전 설치였다. 하루 온종일 내 손 안에서 함께 하는 인터넷. 공기처럼 눈에 안 보이고 당연해서 그랬는지 까맣게 잊고만 것이다.


인터넷이 안 터져도 데이터를 사용할 수도 있고 며칠 TV좀 못 보면 어때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터넷과 TV 없는 3일. 이사 다음날 퇴근을 했더니 안 그래도 집이 넓어져 휑한데 tv도 틀 수 없다니 허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딱히 보고 싶은 게 없어도 마치 라디오처럼 TV를 틀어놓고 적막한 공간을 채우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TV를 틀지 못하니 평소 안 하던 짓을 했다.


정리정돈

일단 첫 번째 변화는 정리 정돈을 재깍재깍 하게 됐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고 나서도 TV를 보느라 혹은 지루한 화면을 보며 소파에 기대 꾸벅꾸벅 조느라 바빠 정리를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곤 했다. 하지만 볼게 딱히 없어지니 텅 빈 화면과 마주하다가도 금방 일어나 밥 먹은 걸 치우며 움직이는 나를 발견했다.


피아노

두 번째는 정말 오랜만에 피아노를 쳤다는 사실! 악보 앞에 앉은 건 어언 1년여 만이었던 듯싶다. 갑자기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다름 아닌 심심해서였다. 전에 유튜브에서 인간은 심심할 때 창의력이 길러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심심하면 뭐라도 찾는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미를 찾아 나서는 게 인간이었다는 걸 TV가 꺼지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조용한 생활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콘텐츠를 찾았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팟캐스트에 올라오는 <조용한 생활>. 팟캐스트는 주로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좋아하는 <비밀보장>을 듣는 용도였다. 더 이상 피아노 치기도 어려운 늦은 밤, 아직 잠은 오지 않고 심심한데, 보고 싶은 유튜브 영상이 있는 건 아니고... 무료로 들을 수 있는 회차들이 있기에 재생버튼을 살포시 눌러봤다. 김혜리 기자님과 김중혁 작가님이 나와서 '메모'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잔잔한 이야기에 귀를 쫑긋 기울이는 게 어찌나 마음 편안하던지! 대화의 톤이나 주제도 딱 내 취향이었다. 인터넷 설치를 제때 못한 덕분에 이렇게 새로운 취향도 발견하니 뿌듯했다.


이사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던 덕분에 그간 무의미하게 TV를 틀어놓았던 게 내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래서 부모들이 자라나는 아이에게 영상 노출을 최대한 피하려 애쓰는구나 하는 것도 몸소 실감해 볼 수 있었고 말이다. 앞으로도 이왕이면 캄캄한 TV화면을 마주한 채 창의력을 키우며 지내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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