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도를 따라

지금 나를 지배하는 감정

by 사월

임신 30주쯤에 접어드니 일상생활만 하는데도 힘에 부치는 게 느껴진다. 그럭저럭 힘이 나는 날이 있다가도 어떤 날에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차고, 어떤 날엔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체력 때문인지 최근 들어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마음이 꽉 막힌 듯 답답하다는 느낌이 자주 들던 참이었다.


속이 답답하다 보니 자꾸만 어디론가 탁 트인 곳으로 훌쩍 떠나고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매일 퇴근을 하면 저녁 7시이고, 요새는 그 시간만 돼도 사방이 캄캄해지는 계절이다. 지금껏 잘 해왔으면서 마음이 이러니 괜스레 이도저도 못하는 내 처지가 답답하고 속상했다.


오후 4시쯤 됐을까. 잠시 환자분들의 내원이 뜸해진 틈을 타 한의원 앞을 산책했다. 창문 하나 없는 원장실이라도 잠깐 벗어나면 기분이 좀 나을까 싶은 마음으로. 뻥 뚫린 하늘을 연거푸 올려다보고, 슬슬 노랗게 물들락 말락 하는 은행잎들을 관찰하며 바람을 쐬고 있으니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그날 저녁,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문득 환자분들께 해드리는 '마음의 방' 그리기를 나도 좀 해봐야겠단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방 그리기는 현재 내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써보면서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는 치료 방법이다.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그렇게 내 마음을 잠깐 관찰해 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이나 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것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던 교과서 문장을 믿고, 내가 나의 치료자가 되어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 한가운데에 '답답하다'는 느낌만 어지럽게 박혀있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니 답답함은 사실 막막하고,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출산 전후로 대진의를 잘 구할 수 있을까? 지원자가 없으면 어쩌지? 내가 자리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한의원이 유지는 되는 걸까? 출산하고 난 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 복잡한 마음을 그저 '답답함'으로 퉁친 것이었다.


마음의 밑바닥에는 또 다른 감정이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고되다'는 생각과 '혼자, 홀로'라는 마음들이 너울너울 내 마음 제일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힘든데, 그 와중에 이 모든 걸 혼자 다 해결해야만 할 것 같은 중압감 같은 것들이었다. 그 마음들을 잠깐 떨어져 살펴보고 있으니 울컥하면서 '외롭고 슬프다'는 감정이 함께 떠올랐다.




그저 답답함 하나인줄만 알았는데, 이렇게나 다양한 감정들이 숨어 있었다니. 자세히 관찰해보지 않았다면 그냥 몸이 힘들어 짜증이 났나 보다고, 겨우 이 정도로 벌써 힘들어하면 어쩌냐며 또 나를 타박했을지도 모른다. 직접 그린 마음의 방을 30cm 정도 멀찍이 두고 가만히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 내 안에서 새어 나오길 기대해 보면서...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우리 딸, 똑순이, 대견해.
누구라도 이보다 더 잘할 순 없었을 거야!


태동이 활발한 기쁨이가 신호를 보내줄 때마다 나름 태교랍시고 불러온 배를 쓰다듬으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딸, 똑순이 기쁨아 고마워. 사랑해."하고 말해주곤 했다. 그런데 실은 내가 너무나도 듣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이 세상에서 엄마만이 내게 쓰던 단어, '우리 딸', '똑순이'를 말이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다 보면 엄마 생각이 더 날 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막상 임신 중에 엄마 생각이 났던 건 아주 초기에 기쁨이 태몽을 꿀 때뿐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나는 덤덤한가 보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엄마 생각을 하면 너무 힘들 것이 겁나 꾹꾹 누르고, 숨기고, 감춰두고 있었다는 걸, 답답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처음 마주한 것이다.


이유 없는 감정은 없다더니 실은 엄마가 보고픈 것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끌어안고 오랜만에 눈물을 쏟아냈다. '그럴 수 있지. 이제야 네 마음이 모두 다 이해되네. 애썼다. 힘들었겠네.' 그렇게 한바탕 소용돌이가 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고, 무얼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하나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엄마한테 다녀오는 것이었다.


10월 안으로는 꼭 시간을 내서 나 혼자 엄마한테 다녀올 테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쏟아내고 와야지.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열려있는 동네 카페에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주말엔 넓은 천변에 앉아 한참을 멍 때리는 사치를 부려볼 테다. 고작 2~3달 뒤면 너무나도 그리워하고 있을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누리고 누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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