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와 딸

멋진 생일을 보내는 방법

by 사월

생일이 끼어 있는 주는 내내 들뜬다. 파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날 내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설레는 한 주가 되는 것이다. 올해 생일에는 뭐라도 내가 나에게 선물을 해보고 싶었다. 뭐가 좋을지 궁리를 하던 중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는데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한 책방의 게시물에 이런 공지가 올라왔다.



<글쓰기 모임을 가볍게 시작합니다. 5월 26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 30분까지>



생일 당일 오전에 열리는 모임이라니, 이거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만다는데, 일상에서 직접 마주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 모임은 참 귀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시간까지 맞는 모임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장 신청했다.



모임 장소는 공주였다. 공주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계신 곳이라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주 오고 간 도시다. 익숙한 동네에 낯선 마음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침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신나는 마음으로 차를 몰고 공주에 도착했는데, 책방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1.jpg 문이 잠겨 당황했었던 가가책방과의 첫 만남

'뭐지? 오늘 모임 취소됐나?

날짜를 잘못 봤나? 설마 저녁 10시였나?'

짧은 시간동안 갖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인스타를 다시 켜서 공지를 확인, 또 확인해봤지만 분명 오늘 오전 10시가 맞았다. 책방지기와의 DM창을 켰다. “저... 오늘 모임 혹시 취소됐나요? 책방 문이 잠겨있어서요.” 알고 보니 근처에 책방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하나 더 있었고 오늘 모임은 거기서 열리는 거였다. 역시 길치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늘도 한 건 해냈다. 다행이도 걸어서 2~3분 거리의 가까운 곳이었다.


2.jpg 진짜 모임 장소였던 가가상점


글쓰기 모임의 첫 번째 코스는 동네 산책. 글을 쓸 때는 뭘 쓸까 채우려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은 비우는 게 중요하다는 책방지기님의 말을 들으며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한적한 골목길을 걷는데 문득 엄마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여기는 진짜 안 변해.”


엄마는 공주에 올 때마다 그런 말을 하곤 하셨다. 그 말이 떠올랐던 건 그날 산책을 하는데 뭔가 이상한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주 다니던 가운데 찻길에서 한두 블록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내가 그간 봐왔던 공주랑은 전혀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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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제민천 주변 풍경


오른쪽엔 제민천이 흐르고, 왼쪽엔 처음 보는 카페며, 목공소, 식당, 새로 지은 가정집들이 보였다. 모양이 모두 다른 건물과 집마다 키우는 개성 넘치는 화분들을 구경하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여기가 제주도인가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산뜻한 동네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공주는 아빠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이다. 아빠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공주로 이사를 왔고, 처음 살았던 집은 세 가족이 모여 살던 셋방이었다고 했다. 그땐 집 밖에 화장실 하나를 세 집이 함께 썼는데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말할 땐 왠지 더 열변을 토하셨다. 그보단 좀 더 넓은 또 다른 집을 거쳐, 결국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고, 거기엔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아빠의 어릴 적 성장기는 화장실과 집의 간격을 점차 좁혀가는 과정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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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안방, 2020


검은 호랑이로 태어난 아빠가 다시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아서 그런지 유독 어릴 적 추억에 자주 잠기신다. 술이 좀 들어가면 어김없이 나와 동생, 이제는 사위까지 앞에 앉혀 놓고 신나게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신다. 내가 더 어렸다면 옛날 이야기나 듣는 게 지루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빠의 어린 시절을 누구보다 생생히 들을 수 있다는 게 내심 기분 좋다.


아빠는 어릴 적 살던 동네가 이렇게 천지개벽한 걸 알고 계실까? 어쩐지 요즘 공주에 내려올 때마다 혼자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셨는데, 달라진 공주를 홀로 즐기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번에 공주에 왔을 땐 아빠랑 함께 오늘 산책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아빠도 공주가 이만큼 변한 걸 봤냐고, 30년 만에 신세계가 됐다고 함께 놀라고 싶다. 그렇게 멈추지 않는 곰의 마을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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