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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29. 2024

엄마의 말이 삶 속에 스며들길

언제나 환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해라.

엄마가 위암 수술을 받고 나서 그런 말을 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그냥 숫자처럼 취급받는 것 같아서 속상하더라."


그곳에서 엄마는 위암 수술을 받은 n번째 환자일 뿐이라는 느낌을 받으셨었나 보다.

긴 투병 생활 중 하루는 갑자기 이런 말도 하셨다.


"환자가 있기 때문에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도 존재하는 거잖아. 그러니 너 앞으로 졸업해서 한의사가 되면 꼭 잊지 말고 환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으면 좋겠어."




환자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일한다는 게 솔직히 사회 초년생 시절엔 너무 버거운 미션이었다. 당장 내 앞에 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특히 대학 병원에서 일할 때는 환자가 너무 많으면 내가 밥 먹을 시간, 쉴 시간, 잘 시간이 사라지니 정말 일감으로만 느껴지기도 했었다. 어떤 날에는 '이 환자보다 내가 더 아픈 거 같은데...' 하는 마음에 억울하까지 했었고.


한의사라는 직업으로 지낸 지 8년 정도 됐다. 그제야 엄마가 했던 말도 조금씩 소화시켜 보는 듯하다. 막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흘러넘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를 찾아오시는 분들께 엄마가 예전에 느꼈던 '사람이 아닌 숫자로 여겨지는 듯한 느낌'은 드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꼭 환자의 '이름'을 부르려 노력하고 있다. 간혹 비슷한 이름의 환자가 동시에 와 계실 때는 혹시라도 다른 이름을 말하는 실수를 할 까봐 더 긴장된다. 그래서 적어도 치료실 커튼을 열고 들어간 직후에라도 꼭 이름을 불러본다. "OO님 안녕하세요?" 하고.


치료가 끝날 때면 인사말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는 게 나의 또 다른 노력이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던가,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같이. 처음엔 안 해 버릇해서 그런지 괜히 민망하고 낯설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환자분들의 반응이 좋아 금세 적응됐다. 게다가 자주 오시는 분들은 나보다 먼저 인사를 하고 싶어서 언제 침을 다 놓나 보고 계시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내 행복을 빌어주시기도 한다.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아주 잠깐 나누고 흩어지는 인사일 뿐이지만, 이런 인간적인 정을 주고받으며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감사가 흘러넘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어보면서.




오늘은 70대 여자 환자분이 첫 손님이셨다. 어제 처음 오셨고 오늘 이틀 째 내원이시다. 첫 손님이신 만큼 나도 파이팅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더 경쾌하게 인사드렸다.


"OO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웅얼웅얼 무어라 대답을 하시는데 엎드려 계신 탓에 잘 듣지 못했다. "네?" 하는 나의 대답에 고개를 빼꼼 드시고 환한 미소로 이런 말을 하시는 게 아닌가.


"선생님, 제 이름 불러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세상에... 순간 진짜 심쿵했다. 그 대답에는 아마도 엄마로, 아내로, 아줌마나 할머니로 살아오신 오랜 세월이 다 담겨 있으셨겠지? 그렇게 잠시 눈을 맞추고 서로 감사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일하다 보면 사진으로 저장하고 싶어지는 이런 순간을 마주친다. 특히 한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자주. 그럴 때 글 쓰는 취미가 있어 참 감사하다. 오늘도 한순간을 사진처럼 남길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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