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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23. 2024

몸보다 사람을 보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

치료실 이야기

보통은 "치료받으며 좋아졌어요." 라든가, "덜 아프니까 정말 편해요"같은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참 좋은데, "오늘은 무릎이 아파요."라는 말만 하시는데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드는 환자가 있다. 바로 정순자 님(가명)의 목소리를 들을 때다.


순자 님을 처음 뵀을 때는 사실 조금 겁이 났다. 70대 백발의 할머니이신데, 정확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항상 잠에 취해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전 원장님께 "정신과 약을 많이 드셔서 약기운 때문에 그런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들었는데도, 막상 직접 대면했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오늘 컨디션은 어떠시냐, 허리가 아프냐, 다리에 힘이 없으시냐, 잠은 잘 주무셨냐...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처음엔 좀 무안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차라리 편했다. 너무 바쁜 날에는 인사 정도만 간단히 나누고 매일 치료하던 대로 침을 놔드리고 나오면 '내 할 일'이 끝나는 거니까. 그렇게 과거의 기록에만 의존해 침 치료를 하던 나날이 지나갔다.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한의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순자 님을 딱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순자 님!"

내 인사 소리에 뒤를 돌아보시며 눈을 마주치시고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셨다.

처음으로 순자 님과 눈을 꼭 맞추고 대화를 한 순간이었다. 또렷이 깨어있는 순자 님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우리 한의원은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건물의 2층에 있어서 계단을 올라오셔야 한다. 순자 님은 뇌경색 후유증으로 왼쪽 몸에는 힘이 없으신 탓에 지팡이를 짚고 여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 계단 힘겹게 올라오고 계셨다.


순자 님 뒤에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침대에 환부를 드러내고 누워 계신 '몸'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한 명의 '사람'으로의 순자 님이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어디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에만 집중하느라 순자 님을 순자 님이 아닌 좌반신이 불편한 분으로만 인식하고 있었구나!'




그 후로는 순자 님이 오시면 꼭 오늘 아침은 뭘 드셨는지, 오시는 길 날씨는 어땠는지, 어제 tv에선 뭐가 나왔었는지를 여쭤본다. 물론 어떤 날은 인사도 못하시고 잠에 빠져 계신 날도 있다. 하지만 깨어계신 날엔 기억나는 일을 대답도 해주시고, 어디가 아픈지도 알려주신다.


"무릎에 침놔주세요. 걸을 때 무릎이 아파요."


오늘은 심지어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먼저 무릎이 아프다는 말을 해주셨다. 아프다는 말이 이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있구나!




순자 님과 대화를 시작하고부터는 순자 님을 만나는 시간이 괜히 즐겁고 기다려진다. 순자 님께도 한의원에 오시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아직도 한의사로서 많이 부족한 나지만, 이렇게 환자분들로부터 배우며 조금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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