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다 <낭만 복서 편>
오랜만에 다시 인터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오랜만이다'라는 말을 쓸 만큼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처음 이 인터뷰를 시작하려 했던 마음을 다시금 떠올리며 인터뷰를 시작하려 하니 조금 두근거렸다. 우연히 새롭게 알게 된 분께 미리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부탁을 드렸다. 너무도 감사하게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소란한 소리가 조금은 가라앉고 더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은 오후 네시 반, 사람이 많지 않은 건물에서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빈 강의실에서 인터뷰를 시작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딸기 주스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양 쪽에 하나씩 놓아두고서 휴대폰 녹음기를 켰다. 새로 시작하는 듯 조금 떨리고 설레어 괜스레 인터뷰 내용을 적어놓은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처음 같은 마음으로 '영화를 현실로 착각한 여자'의 세 번째 인터뷰 녹음을 시작했다.
Q :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인터뷰 취지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물론, 이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인터뷰했던 내용을 보내드렸기에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알고 계시겠지만 굳이 또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영화를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하루에 한 편씩 꼭 보려고 해요. 봤던 거든, 보지 않았던 거든 가능하면 한 편씩 꼭 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영화를 계속 보게 되고 빠져있으니까 현실 감각이 좀 무뎌지거라고요. 그리고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까 내 현실도 영화처럼, 그렇게 될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는데 계속 살다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내 삶이 잘못된 것인가 걱정이 되더라고요. 저는 저만 알잖아요. 제 삶만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살고 있을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이 인터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취지는 이쯤에서 줄이고요. 다시 한번 응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면서.
N : 저도 영광입니다. 영광. (웃음)
Q : 하하. (웃음) 그럼,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가능하면 이 인터뷰를 가명으로 하고 싶은데요. 본명도 상관없지만. 혹시 생각나는 가명이 있으신가요? 별명이나?
N : 음, 요즘 한참 저한테 관심 있는 화두가 드라마인데 또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복싱이었어요. 이 인터뷰를 제외하고 혹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게 되면 닉네임을 뭘로 할까 생각을 해봤었는데.(웃음) 조금 오그라들 수도 있는데, 낭만 복서. (웃음)
Q : 오, 낭만 복서.
N : 약간 내 인생에서 낭만을 찾는 것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로망, 로맨스를 그러니까 굳이 남녀 간에 로맨스를 떠나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낭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조금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서 진지충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낭만을 좋아하고 또, 복싱을 하면서 앞으로 큰일이 아니면 내 인생에 큰 터닝포인트가 없겠다 생각했는데. 사실 자잘 자잘한 계기들 중에 복싱이 또 되게 신선한 전환점을 줬고, 복싱을 좋아하기 때문에. 낭만 복서로. (웃음)
Q : 좋은 것 같아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는. 진지충이라는 말씀하셨는데, 저는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오글거리는 말을 진짜 많이 하거든요. 그리고 그 오글거리는 말이 충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N : 맞아요.
Q : 그것이 배제되면 될수록 세상이 좀 재미가 없어지고 밋밋해지는 느낌도 들고. 오그라들어도 그걸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잖아요. 그래서 되게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래서 좋은 가명 같아요. 그러면 낭만 복서님을 소개해주신다면? 그러니까 틀에 박힌 그런 소개 말고 낭만 복서님이 낭만 복서님을 이야기해주신다면요.
N : 음, 사실 이 인터뷰가 되게 저한테 필요하고 좋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그 제안을 받을 때부터 저는 다른 필요에 의해서 제 자기소개서를 취업 준비하면서 막 생각을 해보면서 이 인터뷰가 너무 고마웠던 게, 나를 조금 더 언어로 표현하려고 더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주변인? 경계인? 이방인? 약간 저는 그런 성향의 사람인 것 같다.
Q : 조금 외로 떨어져 있는.
N : 밖에 머물러 있는. 중간에, 너무 중앙에 가고 싶고 나도 중앙으로 올라가고 싶고, 젊은 청춘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고, 나도 수직상승이라는 걸 해가지고 중앙의 위치에서 서고 싶은.
Q : 주목받고 싶고 알려지고 싶은.
N : 저도 당연히 있어요. 자연스럽게 있죠. 하지만 막상 주목받으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무서워하고.
Q : 저랑 똑같아요.
N : 그리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성향, 내가 좋아하는 성향을 이렇게 보면 늘 그런 제 자신을 싫어했었거든요. 뭐할 때는 뭐해야 하고, 뭐 선택할 때는 딱 선택해야 하고 그런데. 요즘 결정장애란 말이 많이 나오지만 사실 무언가를 살면서 똑 부러지게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그게 그 결정을 하는 게 꼭 결정은 아니잖아요. 결정을 하지 않는 것도 결정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초등학교 때부터 돌아보면, 여학생들이랑 같이 지내다 보면 무리를 짓게 되잖아요.
Q : 맞아요. 딱 그룹이 자연스럽게 생기잖아요. 편한 그룹이. 여자 남자를 떠나서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친해지게 되니까요.
N :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이랑 지낼 때 무리 지어 지내는 걸 힘들어했어요. 그냥 무슨 무리에 들어가서 소속감을 갖고 놀게 되면 다른 친구들이랑도 놀고 싶은데 친구들이 왜 저기 가서 노냐, 왜 그러냐 편 가르기를 해요. 애들끼리 유치한 싸움을 하면 그 사이에서 눈치 보게 되고.
Q : 나랑 더 친해. 이걸 하고 싶은 거죠.
N : 맞아요. 그게 좀 친구들 사이에 질투 같고 왜 더 친하게 놀지 그런 질투심을 저도 갖긴 하지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편 가르고 그러진 않았는데. 질투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치더라도 경계 지어서 편 갈라서 노는 건 좀 힘들었어요. 친구관계를 제외하고도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나 그런 걸 할 때도 그런.
Q : 주변인 같은 느낌이 들어서.
N : 지금 제가 주변인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게 되게, 옛날에는 그게 싫었는데 요즘에는 '그래 내가 생겨먹은 게 그렇지, 뭐' 그런 생각을 해요. 또 그런 모습도 나름대로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를 보고, 영화 캐릭터나 인물을 볼 때 주변인이라서 오히려 평면적으로 볼 수 있는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점이 또 하나의 장점이구나, 나는 이게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은 시각이 다양하다, 통찰력이 있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어서 그럴 때는 이게 장점이구나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Q : 저도 낭만 복서님이 말하는 것에 굉장히 공감이 돼요. 제가 영화를 많이 본다고 했잖아요. 영화엔 주변인의 이야기를 잘 다루지 않잖아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기만 하지.
N : 맞아요, 주변인 이야기하면 거의 독립영화들이죠.
Q : 맞아요. 사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라는 말이 영화 속에서 이 인물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라는 의미이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가끔 영화들 안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배역에도 그 사람의 인생을 다뤄주는 경우가 있잖아요. 하지만 보통 대부분의 영화 속에선 주류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당연하게 나도 저 사람처럼 주인공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지, 저기 지나가는 친구가 되어야지 생각하지 않으니까. 당연하게도 주인공이 되어서 유명해지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N : 인정받고 싶고.
Q : 맞아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고.
N : 맞아요. (웃음)
Q : 그걸 계속 부여잡고 있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어서. 낭만 복서님 말처럼 저도 요즘은 그냥 '그래, 내가 그렇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내 앞에 주어진 일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독이면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밑에서 놀자. (웃음) 너무 위만 보지 말고, 위로 가지 못했다고 내 인생이 망했다던가, 실패했다던가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밑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여기서도 나름 재미가 있고 괜찮아, 그렇게 다독이면서 살고 있어서 너무 공감이 갔어요. 저도 주변인의 한 작은 먼지로서. (웃음) 그럼 낭만 복서님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갖고 있는 꿈이 있나요?
N : 저는 드라마 PD가 너무 되고 싶고 지금 준비하며 공부를 하고 있어요. 드라마 PD가 되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던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사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봤었는데, 어머니가 교육에 열정이 있으셨어가지고 좋다고 하는 건 꼭 해주고 싶어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일주일에 한 번 세계명화나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볼 때도 어디에서 상 받았다더라 하는 영화들을 빌려서 보여주고 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때의 영향이 있었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 스토리텔러의 직업을 매력적으로 느꼈던 이유가 내 상처를 치유받은 느낌을 많이 받아서였어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왕따를, 그러니까 학교폭력을 당했던 적이 있어요.
Q : 직접적으로요?
N : 네. 완전 직접적으로.
Q : 아, 정말 속상해.
N : 그때는 참 죽고 싶었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학교가 세상의 전부였으니까요. 내가 사는, 내가 알고 있었던 세계에서 완전 배제당하는 기분이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영화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갖는 절망감 같은 것들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 당시엔 하루에 한마디도 안 했던 적도 있었어요. 한두세 달 동안 집에서도. 그렇게 말 안 하고 두세 달이 지나고 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말을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외롭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외롭고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러다가 방에서 정말 숨만 쉬고 살고 있다가 우연히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을 봤는데, 아버지가 오빠한테 준 소설책이었어요. <의과대학>이라는 소설이었는데 의대생들이 어떻게 의사가 되는지를 쓴 장편소설이었어요. 제가 진짜 책을 한 번도 안 읽었었거든요. 엄마가 만화책이라도 읽어라 할 정도로.
Q : 저도 어렸을 때 하도 안 읽어서 엄마가 만화책이라도 읽어라 했었는데.
N : 제발 글자라는 걸 보라고 할 정도로 정말 안 보고 영화나 TV 이런 영상매체만 좋아해서 봤었는데, 그때는 정말 책을 단 한 장도 제자리에서 못 읽을 정도로 집중력이 없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서 장편소설을 한숨에 다 읽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영화 같은 일이었어요. 시간이 지나서 조금씩 각색된 면이 있겠지만. 그냥 그때는 오빠를 흉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빠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었는데, 그때 오빠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의사를 꿈꿨고 그래서 이과로 가기도 했었고 그랬었는데 그때 그 책을 읽고 알았어요. 아, 나는 사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의사가 가지고 있는 그 아우라를 닮고 싶어 했구나, 나는 의사가 아니구나라는 걸 그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됐고, 소설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워낙 드라마랑 영화를 좋아했었으니까 글을 보면서 상상했던 그림을 영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쌓여가면서 드라마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영화보다 드라마를 더 많이보고 찾아보고 해서.
Q : 아무래도 접하기 편하니까요. 집에서도.
N : 그래서 드라마 PD를 하고 싶다 생각했는데 또 둘러둘러 알아보니까 드라마 PD가 되는 게 어려운 길이라는 걸 알게 되고.
Q : 맞아요. 생각보다 커트라인이 높고. 생각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아는 게 많아야 하고.
N : 그러다가 시도도 안 해보고 전전긍긍하느니 한번 후회 없이 제대로 해보자, 생각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죠.
Q : 후회 없이 하자는 말이 참 공감되네요. 저도 낭만 복서님이랑 참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책을 안 읽다가 막 심적으로 힘드니까 책을 찾게 되더라고요. 그때 책을 엄청 읽으면서 저도 낭만 복서님이랑 비슷하게 '와 어떻게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로망이 생겼던 것 같아요.
N : 맞아요.
Q : 그러면서 글을 쓰고 싶다, 배우고 싶다 그런 욕구가 막 생겨나는 데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주제에 무슨 글이야, 네가 뭐라고 글이야 이러면서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 엄마가 안 해서 후회할 것 같으면 그냥 해보라고 하셨어요. 안 하고 후회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고.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큰 맘먹고 시나리오 수업을 짧게 들었었거든요. 그때 처음 글을 배우면서 저한테 정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후회해도 해보자', '후회 없이 해보자'라는 게 진짜 공감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N : 어머니가 정말 좋으신 분인 것 같아요. (웃음)
Q : 가능성을 많이 열어주시는 편이시죠. (웃음) 제가 초반에 얘기했던 것처럼 영화가 저한테 정말 여러 의미가 있는 존재예요. 취미고, 하고자 하는 목표이고, 원하는 직업이고, 또 더 이야기하면 영화는 제 삶의 전부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가끔 영화에 관련된 글을 막 쓰다가 힘들어서 '아 쉬어야지' 하면서 영화를 보는 거예요. 약간 그 정도로 영화에 약간 얽매어있는,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얽매어있는데.
N : 인생이랑 엄청 밀착되어 있네요.
Q : 네, 너무 밀착이 되어서 만약 인생에서 없어지면 굉장한 후유증을 앓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혹시 낭만 복서님께도 그런 것이 있을까요?
N : 드라마요. 드라마가 좋고 운동도 좋아하고. 운동과 드라마는 생활에서 많이 붙어있는 것 같아요. 특히 운동보다는 드라마가 더 그런 것 같아요. 영화도 좋아하고 드라마도 좋아하고. 요즘엔 그런 스토리텔러가 되려면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그런 걸 다 봐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진짜 드라마만 봤거든요. 드라마만 너무 좋아하다가 요즘에서야 연극이랑 뮤지컬을 찾아보니까 그 새로운 재미, 묘미가 엄청 샘솟고 특히 요즘 영화 연기 수업을 듣고 있는데, 그 수업으로 연기하는 걸 배우고 직접 해보니까 보이는 거랑 느끼는 거랑 정말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연극을 보는 재미도 엄청 샘솟고 있고 그래요. 최근에 연극 '미저리'를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드라마는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거기도 하고 그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준비하고 있고 해서 아무래도 드라마인 것 같아요.
Q : 그러면 그 드라마가 아까 말씀하셨던, 어렸을 때에 그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 마음이 더 발전되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N :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에서 봤던 다양한 캐릭터랑 스토리들이랑 사건들을 보면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던 일인데,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이랑 어느 순간 접점이 일어났을 때. 그래서 내가 그 캐릭터를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고 그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 깨달음 같은 게 보이는 영상에서 그게 나에게 어떠한 해답이나 해소 거리를 주었을 때, 그때 감정이 다채로워진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해소되는 느낌. 내 엄청 억울하고 힘든 게 탁- 터지고 이해되는 느낌. 뭔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 해소되는 것도 좋지만 그 드라마를 통해서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그 열망이 커졌던 것 같아요. 그 소설을 보고 나서도 드라마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더 깊게 젖어들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럼 드라마 PD가 되려면 나는 뭐를 준비해야 하지, 뭘 해야지 그런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하다 보니까 어쨌든 직업이라는 것은 드라마 PD지만 영화, 드라마, 연극 상관없이 스토리텔러가 되려면은 다양한 캐릭터를 이해해야 하고, 그 캐릭터들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이 사람 마음 어떻지, 이 사건을 겪었을 때 이 사람은 어땠을까.
Q : 맞아요. 어땠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N : 그리고 이 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을까.
Q : 그리고 그 아이는 왜 그 사람을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을까.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심리였을까.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N : 그렇게 관심을 점점 넓혀가면서 사람에서, 사회, 세상으로 번져가면서 그런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장문으로 썼을 때,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게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요. 그 단계들이 넘어가면서 계속 꿈으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Q : 맞아요. 글을 쓸 때 친구들과의 대화나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글을 엮기 시작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니까요. 그런 경험을 하면 글을 쓰는 게 참 재미있다 느껴지는 것 같아요. 들으면서 저랑 비슷한 생각들이 많아서 되게 신기했어요. 저도 드라마 굉장히 좋아해요. 인생 드라마들도 많고요. (웃음) 그럼 요즘 가장 관심을 가지고 큰 관심사가 있으신가요?
N : 사실 요즘 딱 그게 뭐다,라고 자신 있게 반짝반짝거리면서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약간 의기소침한데요. 그냥 지금 복싱이 굉장히 큰 관심사였는데 그것도 사실 지금 안 좋은 추세가 되었어요.
Q : 오, 왜요?
N : 복싱장을 안 나가고 쉬겠다고 말했던 게 바로 며칠 전에 이었거든요. 일 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복싱장에서 두 시간, 세 시간씩 매일 운동했었거든요. 무슨 선수로 나가는 것처럼. 근데 관장님이 자주 외식자리에 불러낼라고 하고.
Q : 개인적으로요?
N : 지난주에도 자꾸 술자리에 부르려고 하셔서. 개인적으로 자기들끼리 먹는 술자리에 불러내고.
Q : 복싱장 사람들이랑요?
N : 복싱장에서 얼굴 한 두 번 마주친 사람들. 남자 몇 분 있는 자리에 자꾸 불러낼라고 해서. 얼마 전에 연락 온 거까지 해서 한 세 번 정도 그랬어요. 그래서 그냥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Q : 친해지면 그렇게 되나 봐요. 선을 지켜주면 좋은데.
N : 저를 이뻐해주고 잘해주시니까. 그냥 이쁜 동생으로, 동생으로 생각하니까 저도 그냥 편하게 생각했었는데 계속 그렇게 이상한 발언들이 쌓이니까 한 번은 복싱장 근처에 여대 기숙사가 신축으로 들어섰는데, '그 여대생들 많이 왔으면 좋겠다, 복싱장이 너무 칙칙하다, 너무 남자들 밖에 없다' 그래서 '왜요, 요즘 초등학생들 늘어서 활기찬데' 그랬더니 '그래도 20대 여자들이 와야 활기차기'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Q : 아직도 '여자는 꽃이다'라는 생각을 하시다니. 그런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꽃이라고 이야기하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칭찬이라는 명목 하에.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N : 저보고 성격이 털털하다면서 여성스러운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그런 말도 하셨어요. 남성스러운 건 뭐고, 여성스러운 건 뭐죠.
Q : 그러게요. 그게 뭐죠.
N : 계속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복싱을 좋아하니까, 운동을 좋아하니까 그냥 무시하면서 운동이 좋아서 손해 안 보려고 했는데, 계속 불러내고 제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로 계속 그러니까. 4월에도 야유회 있다고 버스를 아예 빌릴 거라고.
Q : 그분은 그게 직업이니까 그게 가능하죠.
N : 그러니까요. 그분은 그게 직업이니까 가능하지만 저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냥 취미고 스트레스 풀러 가는 곳인데 무슨 직장생활처럼 지내야 하니까.
Q : 그러게요.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내고 다니는데.
N : 나는 손님인데. 그래서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고. 복싱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Q : 복싱장을 바꿔야 하나요.
N : 내가 사랑하는 복싱을 잃어서 조금 상실감도 있고.
Q : 나 때문이 아니라 타인 때문에 내 취미를.
N : 그러니까요. 저는 또 이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게 나에 대한 이상향이 너무 높은 것 같아요. 그때 더 강하게 밀고 나갈걸.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그만두지 않고 더 오기로 다녔더라면 내가 만약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더 대차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싫다고 피하고 도망치는 게 언제까지 될까. 한번 나도 해보자, 부딪혀보자 하면서 오기로 다녔었는데. 다녔을 때부터, 일 년 전부터 계속 참으면서 다니다 보니까 취미로 하던 건데, 내가 진짜 하려고 하는 본업으로 돌아가자. 드라마 PD 준비를 더 하자 생각하면서 드라마 PD 준비를 더 하고 있고. 다시 관심 있는 화두로 돌아가 보자면.
Q : 오, 자연스러운 진행. (웃음)
N : (웃음) 가장 관심 있는 화두는 드라마고, 그중에서 가장 다루고 싶은 건 청소년 문제예요. 우리 대한민국에서 여성문제 다음으로 가장 천대받는 게 10대들. 10대들 이야기.
Q : 그렇게 낳으라고 하면서.
N : 맞아요. 지금 투표 연령을 낮춰야 한다고 뉴스에서 나오는데, 그게 사실 투표가 하나의 단면일 뿐이지 아이들이 학교에 사실상 감옥처럼 갇혀있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10대들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10대들이 가장 똑똑하고 천재들이 다 모여있는 곳 같다고 생각해요.
Q : 그런데 다 억압시키고.
N : 그냥 학교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Q : 제가 인터넷에서 본 글이 있어요. 사람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게, 정말 뛰어난 재능을 주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는 거.
N : 대박이네요.
Q : 그 글 보고 정말 공감이 확 되더라고요. 스포츠 이야기긴 하지만 저는 김연아 선수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분이 그 말의 축소판 같았다고 느꼈어요. 어린아이가 꿈을 품고 그 꿈을 위해 달려가는 그 상황에서 받게 되는 제약들을 다 겪으셨잖아요. 김연아 선수는.
N : 그런데 그걸 다 뚫었어.
Q : 그니까요. 그걸 뚫고 꿈을 이뤄냈잖아요. 그 모습이 정말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걸까 싶고. 좀 진부한 말이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더라고요. 특히 수능 전에 모의고사 보고 점수 잘 안 나왔다고 자살하는 기사를 보면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파요.
N : 그러니까요. 공부만이 어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닌데. 이건 범륜 스님 말씀이신데, 청소 일을 해도 내가 행복하면 세상이 행복해지는 거라고.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은 끝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데, 결국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진짜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를 때, 정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사실 알고 보면 남이 어떻게 봐주길 바라는, 남이 하고 싶은 걸 내가 하고 싶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이 하던 일이 잘 안됐을 때 자살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서 비관하고, 자살하고, 삶을 포기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10대 때가 가장 인간으로서 억압되어있는.
Q : 그때 참 잘 가르쳐줘야 하는데. 10대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걸. 저는 반대로 10대 때가 행복했어서 그런지 20대가 되자마자 바로 사춘기가 왔었거든요. 아주 심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면서,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러니까.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결정을 잘 못 내린다잖아요. 부모님한테 '이거 해?', '이거 할까?', '이제 뭐하지?' 묻고.
N : 심지어 취업하고 나서도 묻고.
Q : 맞아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렇게 키우니까. 그래서 이제 막 20대가 된 사람들 보면 대학 잘 가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엄마 말처럼 공부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거죠. 계속 하나만 보고 살아오니까. 다른 선택 사항이 없으니까 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N : 제가 사실 복싱을 배우면서 아마추어 경기도 나가보고 그 훈련을 하면서 너무 즐거우니까 이 운동을 하는 게 뭔가 성취감도 있고 단지 체력적으로 강해진다는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수양하는 느낌. 그래서 성취감이 더 값진 것도 있고. 그런 것들이 배우면 배우는 족족, 훈련하면 훈련하는 족족 역량이 향상되는 걸 느끼면서 내가 학창 시절에 공부하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이런 성취감을 여기서 이렇게 얻는 걸보고.
Q : 진짜 성취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N : 어머니, 아버지가 굉장히 희생하면서 특히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엄청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셔서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그게 제가 어머니와 호흡이 맞는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빛이 발했을 텐데 저는 참 엄마와 호흡이 안 맞았던 딸이었기 때문에 너무 고맙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본인이 키우고 싶은 자식 말고 내가 누구인지 좀 봐주지 그런 아쉬움, 안타까움이 들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분명 적성이 예체능이었을 텐데.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내 자식이 특별하게 보이니까. 그렇게 조금이라고 특별하게 보이면 공부, 사짜 직업, 대학교 SKY. 이렇게 생각이 딱 거기로 가버리니까. 만약 어렸을 때부터 예체능으로 밀고 나갔으면, 내 인생 진짜 지금 이렇게 뒤늦게 힘들어하진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좀 남는 느낌이 있죠. 그때 체육 했으면 태능에 있겠다. 몸도 신체 구조가 타고났는데. (웃음) 그래서 저의 관심 있는 화두는 한 사람의 가능성. 10대, 청소년, 말을 잃은 청소년이 가장 관심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을 때 어떤 드라마를 만들까 생각을 하면서 그중에서 가장 관심 있는 건 10대. 꼭 등장시키고 싶은 캐릭터도 10대.
Q : 저도 글을 쓰게 되었을 때 10대 이야기가 많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만큼 떠오르는 기억들이 많아서 그런지 10대 때 인물들이 꼭 한 명씩 포함되거나, 아예 고등학교 때 아이들이 떠오르거나 그러는 것 같아요.
빈 강의실을 비추고 있던 빛은 조금 더 어두워지고 차분해졌다. 조용했던 강의실 밖 복도는 사람들의 바쁜 발소리로 조금은 소란스러워졌다가 이내 다시 차분해지기를 반복했다. 강의실 안의 작은 창문 사이로 자동차들의 소음이 간간히 들리기도 했다. 딸기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음 질문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Q : 그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요즘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세요. 스트레스 푸는 법?
N : 그냥 계속 운동. 다른 운동으로 아침마다. 종교랑 상관없이, 사실 저는 잡교라고 보면 되는데. 매일 아침에 108배하고 명상을 하고.
Q : 저도 다이어트 때문에 해봤었는데 진짜 힘들더라고요.
N : 약간 습관처럼 되다 보니까. 요즘엔 명상을 잘 하지 못하는데, 예전엔 108배랑 명상이 잘 될 때는 내 마음의 상태가 지금 어떤지 잘 읽히니까. 화가 나고 짜증이 나도 그게 읽히니까 편했는데, 요즘엔 그게 잘 읽히지는 않고. 그런 식으로 평정심을 가지려고 하고. 아니면 글을 쓰거나. 불안할 때는 청소도 엄청하고. 요즘에 연극을 좀 보러 다니는데, 연극 보러 가기 직전과 연극 오프닝 직전의 그 설렘.
Q : 맞아요. 불 꺼지고 어둡고 조용한 느낌. 조용한데 사람들 숨소리랑 배우들 움직이려고 하는 소리 들리고.
N : 맞아요. 딱 거기까지 진짜 기분 좋고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설레고.
Q : 저도 그 타이밍이 좋더라고요. 그 암전이 됐을 때. 묘해요, 그때.
N : 설렘의 끝이라고 해야 되나. 두근두근거리고.
Q : 그럼 스트레스 푸는 게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럼 밖에서 조깅도 하고 하나요?
N : 그게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걱정이 돼서 밖에서는 못하고 집 근처에 헬스장이 있는데 거기가 엄청 싸가지고 거기서 운동하고.
Q : 꾸준히. 저도 얼마 전에 수영복을 샀거든요. 안 되겠어가지고. 운동하려고. 근데 수영복 사고 뷔페를 갔어요. (웃음) 모든 걸 잊고 다 먹어버렸어요.
N : (웃음) 먹을 때는 또 먹어야죠.
Q : 운동 꾸준히 하는 거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이 움직여야지 스트레스가 방출되는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게, 정신이 없고 정리가 안되면 방을 청소해요.
N : 저도 여기 오기 전에 세탁기 청소하고 왔어요.
Q : 저도 세탁기 돌리는 거 좋아해요. 가끔.
N : 아, 저는 세탁기를 청소하고 왔어요.
Q : 오, 아예 빼서?
N : 네, 다 빼고 통 안에는 베이킹파우더랑 과산화수소 같은 거 넣어서 돌리면 되고 아래 필터랑 먼지 다 닦고.
Q : 와. 그럼 그 이후에 돌리면 엄청 뽀송뽀송하겠는데요. 저도 해봐야겠어요. 좋다. 아, 이제 질문이 거의 다 끝나가는데요. 그럼 낭만 복서님의 인생영화, 인생 드라마, 연극, 뮤지컬 뭐든 요즘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 혹시 있을까요?
N : 사실 예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던가. 노희경 작가님 작품, 특히. 그 이후에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완이가 자신의 엄마한테 말할 때. 엄마가 그렇게 시켰잖아, 하면서 꽃병을 깨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고 자해를 하는 그 부분에서 진짜 펑펑 울었어요. 진짜 역시 노희경 작가님 작품이구나 생각했는데, 여러 드라마랑 영화를 보면서 계속 작품이 갱신되는 것 같아요. 음, 인생영화를 뽑자면 <나의 장밋빛 인생>. 그게 잊혀지지 않고 가슴 짠하게 남아있는 그런 영화인데, 그게 프랑스 영화고 엄마가 어렸을 때 명작 시리즈를 보여줄 때, 그때 봤던 것 중에 하나인데. 아마 제가 열 살인가 그랬는데 어렸을 때 그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봤었는데. 그때 볼 때는 '쟤는 남자 앤데, 왜 여자 옷을 입고 있지' 이런 생소함 때문에 기억에 남았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그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때는 몰랐죠. 다만 남자 주인공 아이가 '너무 외롭겠다, 너무 힘들어 보인다, 걔 너무 상처받았겠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뭔지도 모르고 딱 보니까 '쟤 너무 불쌍해, 어른들이 쟤한테 왜 저렇게 하지' 생각하고 그랬죠. 크니까 '성소수자 이야기였구나' 알았어요. 근데 되게 동화처럼 예쁘게 애니메이션처럼 꾸민 것도 있고.
Q : 한 번 봐야겠네요.
N : 그게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해서 봤었는데. 영화 자체만으로도 기억에 남는데, 아무래도 계속 기억에 남는 게 제 개인적인 기억이랑 오버랩이 된다고 그래야 하나. 친한 친구 중에 그 아이와 비슷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되게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는데 이제 2차 성징이 지나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사회생활을 각자 하면서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놀면서 '아, 그 친구가 남다른 친구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럼에도 그 친구는 그저 저한테 사람, 친구에 인식이 먼저 있었으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스무 살 되면서 연락이 딱 끊겼어요. 나중에 전해서 듣기로는 성전환 수술을 했고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고.
Q : 아예 성별을 바꾸고 싶었던 분이었나 보네요.
N : 자신의 성 정체성은 여자인데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었고. 그냥 그때 그 친구랑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고. 고등학교 때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말을 안 하게 된 것도 있지만. 나는 걔한테 어떤 친구였을까. 그때, 함께 어울려 놀았던 여자 친구랑 저랑 그 친구랑 셋이 친구였는데 그 남자애는 저 말고 다른 여자 친구한테 더 연락을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나도 선입견이나 편견이 많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친구한테 편안한 친구가 아니었겠다 생각했어요. 사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냥 나는 좀 그 친구한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랬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런 성찰, 반성을 했던 것 같아요.
Q :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어서 공감이 되네요. 저 말고 다른 친구에게 먼저 고민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왜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N : 맞아요. 가끔 보면 그런 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랑 부딪히는 것 같아요. 신뢰감을 받고 싶고.
Q : 맞아요. 나를 먼저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 나를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음, 그럼 인생 영화는 <나의 장밋빛 인생>이고, 인생 드라마는.
N : 음, <디어 마이 프렌즈> 요. 노희경 작가님을 좋아해서 그 마음을 따라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또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그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이 되게 비슷해서 그렇다고 해야 하나. 저도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에 되게 많이 공감이 들고 저의 아킬레스건도 저의 엄마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에게 더 인생 드라마가 된 것 같아요. 사람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고 사람 상태, 그대로 이야기를 되게 잘 쓰신다고 해야 하나.
Q : 맞아요. 사람이 사실 항상 선하고 항상 악하진 않으니까. 좋은 사람, 악한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경계가 참 모호한 것 같아요.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까.
N : 특히 노희경 작가님은 어떤 사건에 사람을 놓아두지 않고 사람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사건이고, 사람 자체가 드라마이니까.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캐릭터의 성장이 눈에 띄게 느껴지는 거. 그래서 특히 좋아하는 드라마는 끝까지 다 본 다음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회랑 마지막회랑 비교하는데, 마지막회에 봤던 캐릭터가 1회 때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들면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그 역할을 하면서 더 깊이 있게 빠지면서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아요. 1회의 모습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걸 발견할 때 되게 재미있어요.
Q : 오, 재미있네요. 다 본 다음에 1회랑 비교한다는 게.
N : 1회 때 인물이 어땠는지, 분위기가 어땠는지 보면 좋더라고요.
Q : 저도 그렇게 한 번 봐야겠어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없어서. 새로울 것 같아요. 음, 그럼 낭만 복서님의 요즘 삶의 낙이 있다면요?
N : 복싱이었는데..
Q : 아, 복싱이었는데..
N : 음, 삶의 낙. 요즘 그런 게 사실 없어가지고. 음, 요즘 연극 보는 거에 빠져서 그거 보고, 드라마도 보고. 또 요즘 공채시험이 떠서 그거 준비하면서 지내는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으로 준비하고 있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걸 준비하다 보니까. 그냥 잔잔하게 깔려있는 것 같아요. 막 좋아서 활기차고 그런 건 없는데 잔잔하게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참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어서 불안도 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좋아하면서 불안함도 함께 공존하고 있으니까. 그게 요즘의 낙인 것 같아요.
Q :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까 저한테 영화랑 삶이랑 많이 붙어있다고 하셨는데, 낭만 복서님도 저 못지않게 그런 것 같아요.
N : 오. 그러네요. 아, 맞아. 생각해보니까 요즘 소소한 낙이 하나 있어요. 아침에 밥 먹는 거. (웃음)
Q : 아침 중요하죠. (웃음)
N : 지금 제가 복싱을 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몸을 만들어놓은 거에는 계속 유지를 하려고 하니까.
Q : 그럼 요리를 해서 챙겨 먹는 거예요?
N : 사 먹는 것보다는 요리해먹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그냥 불닭볶음면을 하나 끓여먹어도 내 기호에 맞게 끓여먹는 걸 좋아하고 즐거워하니까 재미있어하니까요. 가능하면 저녁 일곱 시, 여덟 시에는 안 먹고 아침에 먹으려고 하니까. 그때 안 먹고 아침에 딱 먹으려고 하면 즐겁죠.
Q : 저는 아침 안 먹은 지가 엄청 오래돼서. 아침 챙겨 먹는 게 대단하더라고요. 요리에 취미가 있으세요?
N :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먹는다는 거에 취미가 있으니까. 또 만들어 먹으면 바로 눈에 보이고. 요리가 재미있다고 느낀 게 음식을 만들면서 일일이 맛을 보지 않고 상상하면서 만들었는데, 그 상상한 맛이 먹었을 때랑 딱 맞았을 때 즐거웠던 것 같아요.
Q : 맞아요. 안 먹어봤는데 간이 딱 맞는, 그 기쁨. 이제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요즘 나의 한컷'이라는 이상한 제목을 지은 코너가 하나 있는데요. 요즘 낭만 복서님을 대변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으실까요?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으시면 조금 더 고민해보고서 말해주셔도 되고요.
(며칠 뒤, 이야기하면서 떠올랐다는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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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 음, 고민을 좀 해봤었는데 처음엔 복싱 글러브 사진으로 할까 하다가 다양한 것 중에 지금 막 떠오른 건, 얼마 전에 친구들이랑 만나서 밥을 먹었는데 진짜 발우공양을 했어요.(웃음) 같이 먹던 친구들은 배불러서 더 못 먹겠다고 했는데 저는 왜 배가 부르다는 거지? 하면서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빈 접시로 만들었어요.(웃음)
Q : 진짜 다 비우면 되게 뿌듯해요.
N : 그 밥 사준 친구도 아이고, 잘 먹는다. 정말 뿌듯하다 그러더라고요. 근데 왜 갑자기 그 사진이 떠올랐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왜 뽑고 싶은 걸까.
Q : 나는 잘 먹고 잘 산다. (웃음)
N : (웃음) 기분 좋아서 그랬나 봐요. 맛있게 먹고 맛있게 비우고 걱정 없이 비웠다는 그 느낌 때문인 거 같아요.
Q : 음식을 잘 먹고 비운다는 게 정말 중요한 게, 제가 정신적으로 힘들 때 밥을 잘 못 먹더라고요. 밥을 항상 남기고. 요즘엔 그나마 좀 나아졌는데 예전에는 낯선 사람들이랑 밥을 잘 못 먹었어요. 맛이 느껴지지가 않는 거예요. 먹고 있는데. 카레를 분명 먹고 있는데 입에선 카레 맛이 느껴지지가 않더라고요. 편하지가 않으니까. 그런데 편하거나 좋은 사람들이랑 밥을 먹을 때는 편안하니까 잘 맛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먹을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더라고요.
N : 너무 좋네요. 그 사진으로 그대로 해야겠어요.(웃음) 지금 꿈보다 해몽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게 아주 쉽고 간단하고 일상적이면서 어려운 일인지. 저도 사실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까 오빠랑 같이 살아도 같이 밥을 먹을 일이 적다 보니까 거의 혼밥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친구들이랑 밥을 먹을 때 거리낌 없이 즐겁게 편안하게 비워낼 수 있다는 게 이게 보통 일이 아닌데.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 했는데. 되게 좋네요.
Q : 그게 쉬운데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밥 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N : 맞아요. 밥 정
Q : 그래서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맛을 느낀다는 게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이제 준비한 인터뷰 내용이 모두 끝이 났어요. 진짜 수고 많이 하셨어요. 거의 한 시간, 한 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진행한 것 같은데 끝으로 인터뷰를 한 소감을 짧게 말씀해주신다면요?
N : 나를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서 참 좋았고 특히 마지막에 빈그릇의 사진의 의미를 이렇게 꿈보다 해몽으로 변화하는 그런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어서 되게 재미있고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이렇게 인터뷰를 해주시는 분과 교류가 된 것 같아서 좋고. 108배와 명상을 할 때만큼이나 지금 내 마음이 어떻고, 지금 내 삶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이고 그런 것들을 되짚고 정리하고 의미를 지으니까 조금 더 내 미래와 가능성이 있다, 라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Q : 그렇게 느끼셨다니 너무 좋네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사실할 때 마다라고 말하기엔 횟수가 적지만. 할 때마다 항상 너무 좋더라고요. 이야기를 진짜 제대로 나눈 기분이 드는 것 같아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수고 많으셨고요. 감사합니다. 끝- (짝짝)
N :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끝- (짝짝)
다시 시작하게 된 인터뷰라 그런지 시작 전부터 조금 긴장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도 많았었는데, 인터뷰이었던 낭만 복서님의 매끄러운 진행과 재미있는 이야기에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용한 빈 강의실에 들어왔던 빛의 따스함처럼 대화는 무척이나 유쾌했고 따뜻했다. 특히나 비슷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분이어서 더 많이 공감이 갔고,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 드는 시간이었다. 한동안 멀리했던 이 인터뷰에 다시금 재미를 붙이게 된 시간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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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