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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브릴 May 20. 2019

4차원 시간 여행 (上): 폼페이 편

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나폴리 03







:: 1 ::


나폴리에서 베수비오 화산 방향으로 약 15분마다 오가는 열차가 있다. 'Circumvesuviana'라는 로컬 열차인데, 가죽 필통에 올라탄 듯 아주 오래되고 앤틱(antique)한 느낌을 준다. 안에는 청국장같은 치즈 냄새가 꽉 차 있고, 곧 나타나는 버스커(?) 밴드의 집시풍 연주가 아주 인상적이다. 폼페이 유적지(Pompeii)*까지는 3, 4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폼페이 유적지(Pompeii): 'Pompei'와 'Pompeii'라는 두 가지 표기가 헷갈릴 것이다. 'i'가 하나인 'Pompei'는 현재 이탈리아에 소재하고 있는 폼페이의 도시명이다. 고대 폼페이는 'i'를 두 개 사용하여 'Pompeii'로 표기한다.



"성인 한 장이요."


매표소에 도착해서 표 한 장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매표원이 내 얼굴을 쓰윽 올려다보곤 이렇게 말했다.


"Free for you(당신은 공짜예요)."


좀 당혹스럽지 않은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좀 허둥거렸다. 'for you(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이 퍽 사적인 느낌으로 다가와서 더욱 그랬다. 내가 어려보이든 외국인이든 그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면 매표원이 그 유명한 '이탈리아 남자'였냐고?


"공짜요?"


그렇단다, 공짜란다. 그러면서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더라. 이 무슨 농담인가 싶은 기분이었는데, 매표원이 내민 티켓에 정말로 '€0,00'라고 찍혀 있었다.



여자라서 무료라니
(⋯) 권리를 박탈당하는 기분이었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로마 시민권에 대한 내용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오갔다.


생각지 못했던 터라 조금 신나긴 했는데,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여자라서 무료라니 이런 격한 우대는 듣도 보도 못했다.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은가. 게다가 단순히 남녀차별 문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으로서 우대를 받으면서, 그와 동시에 권리를 박탈당하는 기분이었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로마 시민권에 대한 내용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오갔다. 여성은 시민이 아니었다. 외국인도 그러했고 노예들도 마찬가지다. 여성이기 때문이든 외국인이나 노예이기 때문이든,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낼 필요도 없지만 아무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듯 소외된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free'라는 단어가 '무료인, 공짜인', 외에 '자유로운'이라는 뜻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와 닿았다.



로마 시대에 여성으로서 사는 건 실제로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로마에 있지만 로마의 주인일 수는 없는, 로마로부터 소외된 삶'을 사는 느낌이었을까?


머릿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마구잡이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 2 ::


원본 출처: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


유적지를 왔다갔다하며
상상력을 좀 끌어올려보기로 했다.
서기 0년 즈음의 폐허들을
그 옛날 번영의 시기로 끌어올렸다.


폼페이는 사실 와보고 싶었다기보다 한 번 와보아야 할 것 같아서 왔다. 못 보고 가면 아쉬울 것같기도 했고. 하지만 역시 크게 감흥은 없었다. 고고학은 책으로 읽으면 재미있지만, 실제 방문하는 건 그냥 백과사전 실사판같은 느낌이다. 죄다 설명이 붙어있으니 발견하는 맛조차도 없다.


대신 유적지를 왔다갔다하며 상상력을 좀 끌어올려보기로 했다. 서기 0년 즈음의 폐허들을 그 옛날 번영의 시기로 끌어올렸다*. 무너진 벽들을 다시 세우고, 기둥 근처에 모인 여인네들이 수다를 떠는 모습, 어린 아이들이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를 내며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만들어냈다.

*폼페이는 기원전 7세기 말에 건립되었고,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소멸했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 중 하나이다.


원본 출처: 영화 <비지터>


이 곳에서 나는 여전히 '외국인 여자'였다. 시민이 아닌 'free'한 자. 티셔츠와 청바지, 트렌치 코트, 선글라스, 운동화와 백팩을 장착한 '이국적인' 차림으로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검은 색 곱슬 머리 여자 아이 하나가 웃는 얼굴로 달려왔다.



아이는 계속 자국어로 말하면서 나를 이리저리로 이끌었다. 무슨 얘기를 하더냐 하면, 그야 나도 모르지. 그 먼 옛날 폼페이 지방에서 쓰던 말이었을 것이다. 로마에도 나폴리에도 동양인인 나를 신기하게 여기는 아이들이 있다. 자국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한다. 이들과 뭐 다르겠어.



방문자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 상상 속으로 들어오고
(⋯)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기 시작하며,
서로를 마주하고 발견하는 느낌


이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혼자 잘 놀았네'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 이 상상 행위는 매우 어려웠다. 배경 지식이 거의 없어 머릿속에 단편적인 상상으로만 떠오르곤 뚝뚝 끊어졌다.



아쉬워하던 차였다. 그 때 마침 백인 남자 두 명이 곁을 스쳐지나갔다. 전형적인 여행자 차림을 한 이 두 사람에게선 독일인과 미국인 분위기가 풍겼는데, 그들이 불쑥 시야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내 상상 안쪽까지 밀려든 것이었다.



번뜩하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폼페이 유적지 여기저기의 여러 방문자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 상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러 외국인들이 수없이 오가는 번영한 항구 도시 마냥, 고대 폼페이와 현재 사람들의 발걸음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기 시작하며, 서로를 마주하고 발견하는 느낌을 그 때 처음으로 겪었다. 에피파니*의 순간이었다.

*에피파니(Epiphany):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 속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감각 혹은 통찰을 뜻하는 말이다. 본디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가죽 필통 기차를 타고 나폴리로 돌아왔다. 메트로 단테 역에서 내려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으면서 파스타 식당을 찾았다. 적당히 현지인이 좀 앉아있는 식당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봉골레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던 중, 둥그런 몸집의 웨이터 하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러더니 작달막한 노란 꽃가지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던가.


깜박하고 테이블 장식을 안 한 건가, 생각이 들었는데 웨이터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성의 날이에요."


그랬구나, 여성의 날, 그런 게 있었지. 한국에서는 여성의 날이라고 특별히 득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폼페이 입장료가 공짜였던 것도 그 이유였던 모양이다.





점심 식사 후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4차원 시간 여행 (下): 나폴리 편 (ft. 아이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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