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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브릴 Jun 17. 2019

'아싸'들에게 보내는 여행자의 편지: 니체의 싸움

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03







:: 1 ::



한국을 떠나온 뒤로 언제나 이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어딜 가든 전 잠시 머물 뿐이고, 절 기억하는 사람이란 거의 없을 거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사는 동안 그토록 억눌러야만 했던 제 자신과, 늘상 어색하기만 했던 페르소나*를 벗어 던져야겠다고요. 한국에서 전 왜 그렇게 이상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을까요?

*페르소나(Persona):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 원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다.



세계일주를 떠난 지도 벌써 12일 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전 마냥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니까요. 하지만 의심스럽지만 않다면, 이 곳에서는 얼마든지 어색하고 이상해보여도 괜찮습니다.


로마와 바티칸에는 관광객이 넘쳤습니다. 카프리와 소렌토, 포지타노, 아말피에선 관광객일수록 환영을 받을 수 있더군요. 모두들 외국인이 돌아다니는 데 너무도 익숙했고, 저 또한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끔 절 경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노인들,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 어린이들의 보호자 말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오히려 기뻤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하는 모습이었거든요. 분명 이탈리아는 소매치기로 악명 높고, 이 곳에서는 저 또한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원본 출처: 위키피디아


지금 저는 이탈리아 남서부, 아말피 해안의 아주 아주 작은 도시에 와 있습니다. '동양인 여자 하나가 돌아다닌다'하고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을 지도 모를만큼 작은 곳입니다.*

*아말피 해안의 소도시 ‘미노리(Minori)’를 말합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아말피 해안의 에덴'으로 표류하다>를 참조해주세요.


이 곳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그리고 몹시 흥미롭게 저를 관찰하지요. 난생 처음 생치즈를 사느라 슈퍼마켓 주인에게 좀 성가시게 굴었더니, 절 어리게 봤는 지 귀여워 하는 척 볼을 슬쩍 꼬집어보더군요.


미로같은 이탈리아어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힐끗거림, 중간 중간 들려오는 '벨라*'라는 단어, 말투에서 묻어나는 감정들과, 그러다 터져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입니다. 그래서 제 얘길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지요.

*벨라(Bella): '미녀', '예쁜 여자'라는 뜻.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아가씨', '숙녀분' 정도의 뉘앙스로 빈번하게 사용된다고 느꼈다.


그 뿐입니다. 우리 모두 외국인을 보고 웃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압니다. 어딘가 어색해보여도 웃음이 나오고, 너무 익숙해보여도 웃음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제가 영어로 말해도 웃고 이탈리아어로 말해도 웃더군요. 때로는 질문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웃는데, 이럴 때면 도통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렇게 웃다가도, 저에게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야할 때가 생기면, 약간 난처한 굳은 얼굴로, 아주 심각하고 예절 바르게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절 어떻게 대하면 좋을 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절 어떻게 대하면 좋을 지
몰랐던 것이지요.


사람들이 너무 웃어서 가끔 기분이 좋지 않기도 합니다. 그럴 땐 왜 웃는 건지, 제가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여쭈어보면 되는 걸까요?




:: 2 ::



우리나라에서 '장르'라는 사고이나 표현이 필요할 때는 보통, 어떤 작품을 소개해야 하는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를 거론할 때는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했던 것 같고, 또 음악과 문학에서 약간씩 사용할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장르'라고 하면, 어떤 스타일에 대해서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타일을 일컫는 일종의 카테고리라고 할까요. 스타일을 한 두 단어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으니 많이들 사용하게 되는 개념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음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원본 출처: https://www.statista.com/chart/15763/most-popular-music-genres-worldwide/


동요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는지, 어릴 때는 음악에 거의 흥미가 없었습니다. 가끔 로큰롤 스타일의 TV 만화 영화 음악에 매력을 느꼈던 정도지요.


그러다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이 5학년 때입니다. 이지훈의 <왜 하늘은>,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 이 두 곡 덕분이었지요. 지금으로 치자면 <인기가요>같은 프로그램에서 몇 주 씩 1위를 차지하곤 하던 곡들입니다. 얼마 후에는 집에 대만 방송 '채널[V]'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국 음악도 접하게 되었지요.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에 빠져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팝도 듣게 되었습니다. '채널[V]' 덕분에 한국 공중파 방송이나 라디오로는 접할 수 없는 스타일의 음악도 이것 저것 접하게 되었고, 곧 흑인 음악과 락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원본 출처: bbc.com


이 때는 아직 '리스너'들이 존재하기 전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락빠'들의 시대였지요. 락빠들을 중심으로 '더러운 팝(dirty pop)'에서 순수한 락을 구원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영향인지 '장르'의 중요성이 굉장히 강조되곤 했습니다. 이 때는 저도 음악 장르 구분을 굉장히 잘 했습니다. 쓰면서도 웃기지만, 천리안과 나우누리 시절*에 동부 랩과 서부 랩을 구분할 수 있었던 드문 여자 아이였습니다.

*모뎀과 전화선을 사용하던 시절 주로 쓰이던 포털 웹 서비스. '천리안'과 '나우누리'는 그 서비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세계 음악 씬에서는 크로스오버*가 성행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중 음악보다는 현대 음악 쪽에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음악을 접하려면 TV를 보거나 매달 한 두 장 음반을 구입하는 게 고작이었던 저에게 이 '크로스오버'란 개념 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거든요. '크로스오버'가 뭐지, 하는 물음표가 늘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었습니다.

*크로스오버 음악(Crossover music): 어떤 장르에 이질적인 다른 장르의 요소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음악.


닥터 스트레인지가 듣는 음악은 얼마나 낯설고 이상할까?


순식간에 저는
'낯선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
을 좇아 음악을 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저의 음악 사랑이 시작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터디하듯 음악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접한 음악이 많지 않다보니 당시에는 새로운 것들이 넘쳤거든요. 처음에는 이상하지만 듣다보면 좋아지는 곡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저는 '낯선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좇아 음악을 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들었던 곡의 수의 비해서 굉장히 빠르게 이 음악 저 음악 다 듣게 되었고, 곧 '요새 들을 거 없다'고 말하는 상태를 아주 빈번하게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에 이 답답함을 깨는 건 간단했습니다. 오랫동안 물음표로만 존재하던 '크로스오버'를 실행하면 되었으니까요. 단순히 '장르'에 대한 생각 자체를 버렸습니다. 이 단순함만으로도 곧 좀더 다채롭게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좀더 지나고 나서는 장르 구분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음악들이 좀더 그렇지만, 실은 한 두 가지의 장르로 정의될 수 있는 음악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장르 구분을 못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르라는 건, 모든 분야에 있어서, 단순히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거지, 애초부터 장르에 맞추어 음악 세계를 계산하고 구획한 다음에 음악을 만든 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애초에 음악에는 구분이라는 게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 이 '구분을 의심하는 병'은 훨씬 멀리까지 나아간 상태랍니다. '공감각'과 마찬가지로, 음악이고 문학이고 뭐고, 원래는 모두 다 하나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탈리아에서 2주만에 제 영어 억양이 틀어졌듯이, 음악과 언어는 틀림없이 한 몸입니다. 시는 특히 그렇고요. 음악과 춤은 어디에서 분리하는 게 좋을까요? 무용과 연극은? 뮤지컬은? 그러면 거기에서 또 문학은요? 또 신화들은? 그렇다면 신은? 만약 당신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언어는 얼마나 분리되어 있나요? 춤은 또 얼마나 분리되어 있습니까?


이런 사고를 억누르고 싶었던 적 없으신가요? 모든 것들에서 모든 것들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고 싶어하는 머릿속의 끝없는 작용 말씀입니다. 전 이걸 꾸깃꾸깃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넣고 싶어요.




:: 3 ::



어제부터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의 소설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를 읽고 있습니다. 이제 1/4 정도 봤네요. 여기까지는 '테스'라는 조숙하고 예쁜 여자 아이가, 못된 남자 때문에 숲 속에서 처녀성을 잃고 아기를 갖게 되는 부분입니다. 출생 직후 사망하는 이 아기에게, 테스는 '소로우(슬픔)'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후로 점차 시간이 흐르고, 테스는 절망을 극복하고 마을을 떠납니다.


이 1/4에서, 작가는 줄곧 테스의 본래적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여쁜 얼굴과 순수하고 도덕적인 마음,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는 성격. 사건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계속해 테스 주위에 후광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마돈나)'와 '슬픔에 빠진 성모 마리아(피에타)' 모티프를 차용해 테스를 성인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지만 테스는 예수가 아니라 '소로우'의 어머니입니다*. 아기를 밸 때는 그만 처녀성을 잃고 말지요.

*'맨 오브 소로우즈(Man of Sorrow)'는 예수의 별칭이다. 테스가 '소로우'라는 죽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에는 '마돈나'와 '피에타' 모티프가 동시에 차용되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테스가 희망을 찾는 과정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 잃으면 영원히 잃는다는 말은 순결에도 적용이 될까, 테스는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다. 과거를 감출 수 있다면 그 말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기체의 속성인 회복력이 유독 처녀성에만 적용되지 않을 리 없었다.


물고기 모양 기호 '베시카 피시스(vesica piscis)'. 여성의 질, 성화의 후광 등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한 달에 한 번
자궁은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데,
왜 이 단백질 막은
되살아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성에 관한 내용이라 그런지 여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자궁은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데, 왜 이 단백질 막은 되살아나지 않는 것일까요?


어쩌면 고대부터 이어진 ‘처녀성’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이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Virgin Mary)'도 그렇고, 처녀인 여자들을 제물로 삼는다든가, 처녀성을 잃으면 샤먼으로서의 힘을 잃는다든가, 이런 이야기들이 많지 않습니까. ‘생명의 통로’가 아직 닫혀있어서 그 안에 어떤 힘이 아직 봉인되어 있다는 상징적인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 4 ::



한 두 해 쯤 전, <소리를 보는 사람들(The Frog Who Croaked Blue: Synesthesia and the Mixing of the Senses)>*이라는 뇌인지과학 논문을 읽었습니다. '공감각'에 대해 다루고 있는 논문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지적하지요.

*영국 서식스대학교 인지신경과학 교수 제이미 워드(Jamie Ward)가 저술한 책. 공감각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우리가 지닌 감각은 몇 종류일까? <뉴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 2005년 1월호에 수록된 한 논문에 따르면 스물 한 종류, 혹은 열 종류, 혹은 서른 세 종류라고 한다. 아니면 세 종류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오감, 즉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의 다섯 가지는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감각, 곧 오감은 하나의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오감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답습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요.


인간의 감각이 다섯 가지라고 생각하는 서구의 전통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 경의 인물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그 당시 상상 가능했던 학문 분야를 모두 섭렵했다. 과학과 의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9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져 왔으며, 그의 과학 중 일부는 우리의 일상적인 문화에 아직도 살아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감각은 다섯 가지라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은 눈, 후각은 코 등 각각의 감각이 하나의 감각기관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저자는, 아기들에게는 단 하나의 '통합된' 감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아기의 감각은 몇 가지일까?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신생아에게는 한 가지 감각밖에 없다. 이들은 인간의 유아가 한 가지 형태의 공감각으로 삶을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이 공감각에서는 모든 감각이 서로 뒤엉켜 있어서 보는 것은 물론이고 듣는 것도 시각을 촉발할 수 있다.

*다프네 모러(Daphne Maurer)와 찰스 모러(Charles Maurer)


차츰 성장하면서 '감각(sensation)'을 '지각(perception)'하는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를 통해 보통의 어른이 된다고요.


사실 공감각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초기적이고 미미한 수준이라, 이것들이 사실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어떤 답을 기대하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통합된 감각이 지각 과정에서 분리되는 것이라면, 그건 인지 재학습을 통해 다시 통합시키거나, 혹은 재분류를 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 분리의 과정, 다시 말해 카테고리와 장르를 끊임없이 세분화하는 이 어리석은 두뇌 작용에도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있을 지 모를 일입니다.


인형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다산(多産), 모성을 상징한다. 원본 출처: 하단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 M과 F가 만나야 하는 것처럼, 어쩌면 새롭다는 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 보다 섭리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외계에서 온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니거니와 묘사할 수도 없는 어떤 물질같은 게 아니라, 새롭게 조합되어 낯설고 익숙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더 진정성이 있을 지 몰라요.


그렇다면 그 ‘단백질 막’은, 생명의 힘이 봉인된 어떤 신비가 아니라,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것이 생명의 문이고 통로이기 위해서는 재통합과 분리가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씀입니다.


어쩌면, 절 보고 경계하면서도 호감을 갖는 외국인들처럼, 낯설다는 건 하나의 얇다란 막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한 번 열리고 난 다음에는 새로운 통합의 변화가 일어나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정도의 아주 얄팍한 경계 말씀이에요. 그렇기에 그 막은 복구되지는 않지만 그 새로운 통합의 결과물은 또 하나씩 새로운 막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지요.


출처: 영화 <비지터 리턴즈(Les Visiteurs: La Révolution)>


반복하지만 저는 '낯선 것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좋습니다. 그동안 ‘이상한’ 것들과의 단백질 막을 너무 많이 허물어서 제가 점점 이상한 느낌과 분위기를 풍기게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도 'foreigner(외국인)'이고, 'immortal(불멸)*'을 낳을 수 없는 한 '소로우(슬픔)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을 지도요.

*유럽의 전통에서 '불멸하는 자'는 흔히 신을 가리킨다.


그래도 1/4 지점의 테스처럼, 저는 또다시 절망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설령 사람들 속 ‘별개의 인간’으로 치달아갈지라도, 들이쉬고 내쉬고, 계속해서 가슴 속에 세계를 합쳤다가 세상으로 내놓도록 하자, 마음을 다잡습니다. 저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영원회귀의 생명, 바로 니체의 싸움이니까요.


마치 네가 수도 없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라!

- 프리드리히 니체



2016. 3. 14

아싸, 이방인, 낯선 사람, 여행자

애브릴로부터






메인 사진 출처: 영화 <비지터 리턴즈(Les Visiteurs: La Révolution)>

마트료시카 이미지 원본 출처: User:Fanghongderivative work: Greyhood (talk) - Russian-Matroshka_no_bg.jpg,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676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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