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피렌체 01
로마에서 수많은 성당을 헤집고 다닌 나에게 '피렌체 성인(聖人)들의 얼굴'은 너무나 급진적으로 다가왔다. 똑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령 이탈리아에 널리고 널린 '피에타*'를 예로 들어보자.
*피에타(pietà): '슬픔', '비탄'을 의미한다. 서구 문학과 예술에서 흔히 사용되는 주제 중 하나로,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한다.
'피에타'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 중 십중팔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부터 떠올릴 것이다. 로마에 소재*한 이 르네상스의 걸작을 보면, 현대인으로서는 결코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바티칸 시국 산 피에트로 바실리카(San Pietro Basilica; 성 베드로 대성당)에 위치해 있다. 로마와 피렌체를 비교하는 문맥을 고려하여 여기서는 로마 소재로 적었다.
마리아는 어린 아이를 무릎에 누인 어머니와 같은 자세로 죽은 예수를 안고 있다. 앳된 마리아의 얼굴은 굉장히 차분하고도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살짝 미소짓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보이고, 그래도 조금쯤은 슬퍼하고 있겠지 생각하면 또 얼마든지 슬프게도 보인다. 담담한 표정의 마리아는 오른팔로 아들의 몸을 지지하고, 하늘을 향해 왼손 손바닥을 들어올린다. 마치 하느님께 당신 아들의 생명과 영혼을 바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피렌체의 성모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은 아들이
못마땅하다.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며,
하늘을 향해 의문을 갖는 듯한
표정도 드러낸다.
반면 피렌체의 마리아들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다. '예쁜 손'만 제외하면, 이들은 틀림없이 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자들이다. 얼굴의 주름을 보니 서른 넘은 아들을 두었음에 틀림없고,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보며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내가 죽었으면' 생각했을 '인간 어머니'의 얼굴이다. 피렌체의 성모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은 아들이 못마땅하다.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며, 하늘을 향해 의문을 갖는 듯한 표정도 드러낸다.
피렌체의 '성모자(聖母子)'를 보다보면 짠한 기분이 들곤 한다. 보통의 어머니 품에 안긴 보통의 아기로만 보이니까. 이들은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가진 경건하고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다가올 운명을 깨닫지 못한 채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드라마 주인공 같다.
피렌체에서는 아기 예수를 젖물리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또 간혹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젖꼭지를 노골적으로 쥐고 있는 경우도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이런 표현은 신성 모독 논란이 있을만한 사항이니, 그 시대에는 도대체 얼마나 파격적이었을까. 또한 그것은 얼마나 강력하게 '마리아와 예수는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을까.
피렌체에서 유독 자주 눈에 띄는 얼굴 또 하나가 있다. 수수한 수도자의 복장과 허리춤에 동여맨 새끼줄, 대머리, 손과 발의 성흔*, 맨발. 늘 똑같은 캐릭터로 표현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 사람이 바로 '맨발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다.
*성흔(Stigma; Stigmata): 예수가 수난 당시 받았던 것과 유사한 상처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흔적.
근대로 접어드는 마당에, 몸에 성흔까지 나타날 정도로 종교에 열성적이었던 성 프란체스코는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것일까?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을 보면, 시오노 나나미*는 성 프란체스코를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일본인 작가.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이탈리아에 관한 다양한 저작을 내놓았다. <로마인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을 시인인 단테나 화가인 조토로 보는 경향은 르네상스라는 정신운동이 예술 분야에서 거둔 성과에만 조명을 맞추는 경향의 연장일 겁니다. (⋯) 역사상 예술 분야에서 가장 화려한 성과를 거둔 르네상스에 비옥한 토양과 충분한 물과 햇빛을 마련해준 것은, 언뜻 예술과 무관해 보이는 종교인인 성 프란체스코와 정치가인 프리드리히 2세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그 첫 번째 이유는 중세의 권위적 가톨릭 체제에 대한 성 프란체스코의 민주적 태도에 있다. 당시 가톨릭 사제들은 라틴어로 종교 활동을 수행하며 신의 대리자이자 경전과 교리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민중들은 라틴어를 익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라틴어로 설교를 듣고 기계적으로 기도문을 암송해야만 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이탈리아어를 사용하였으며, 크리스트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둘째로 성 프란체스코는 평신도로서의 삶을 '선택'으로 여기고 긍정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로마 교황청을 필두로 성직자 '클레로(clero)', 수도사 '프라테(frate)', 평신도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는 사회의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평신도들이 수도원에 들어가고 말고는 선택의 문제이며, 수도사가 되지는 않더라도 1년에 며칠만 수도원에서 기도를 하면 얼마든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개신교 혁명을 상기시키는 성 프란체스코의 이런 태도는 당시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을 감복시켰으며, 그 중에는 신흥 계급인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성 프란체스코는 이런 사람들을 모아 '제3계급'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편입시켰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프란체스카 수녀회'에 '제3계급' 여성들까지 편입하게 되면서 프란체스코파 신도가 급증했다.
성 프란체스코를 르네상스인으로 보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선택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벗겨놓은 수산나를 마주한 순간, 나는 적잖이 놀랐다. 수산나 미술품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닌데다, 로마와 바티칸에서부터 줄곧 수산나를 찾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산나를 찾아다닌 이야기는 '바티칸 & 이탈리아 로마' 여행 2편 <로봇이 녹기까지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로봇이 녹기까지는>을 찾아봐도 '수산나'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글에서 '수산나'는 '엄마'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수산나는 엄마의 세례명이었고, 로마와 바티칸 여행은 엄마를 기리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차에 하필 수산나의 누드라니* 보통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수산나와 원로들>은 정원이라는 풍경과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를 함께 그릴 수 있는 인기있는 주제였다고 한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따위가 뭐라고
엄마는 자신의 몸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다. 전형적인 서양 배(하체 비만 형) 체형이었는데,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상체는 이집트 인처럼 말랐고 하체는 그리스 인처럼 살집이 있었다. 엄마는 다리에 자신이 없었다.
"미니 스커트도 한 번 못 입어보고 죽네."
호스피스 침대 위에서 엄마가 했던 푸념 중 하나다. 아빠는 이 얘기를 듣고 다소 짜증이 나신 듯했지만,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사항일 것이다. 미니 스커트 따위가 뭐 별 거라고 죽을 때까지 한 번 입어보지도 못했을까.
하지만 엄마 몸을 빼닳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발과 발목 외엔 하반신을 드러내 본 적이라곤 없었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따위가 뭐라고 한창 예쁜 시절에 몸을 가릴 생각만 했을까.
중세가 끝나가던 시절, 르네상스 인들은 땅 밑에 묻혀 있던 이교도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육감적이고 풍만한 로마 조상들의 모습은 중세 여인들이 선호하던 모습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불편함과 나름대로 아름답다는 두 가지 느낌을 모두 받았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썼다.
어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눈이 흐려져 있지만 않으면, 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품을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예술품인가를 당장 이해했을 게 분명합니다. 르네상스인의 인체 재발견이 곧 나체의 아름다운에 대한 재발견이었던 것은 옷을 입은 중세 조각품을 보는 데 길들여진 뒤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화적 충격' 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을 겁니다. 중세 사람들이 본 나체상은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하는, 비쩍 마른 그리스도뿐이었으니까요.
-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당대 우리나라의 미의 기준이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보다는 '비쩍 마른 그리스도'에 가깝다는 것 또한 꽤 재미있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완벽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다비드를 바라보니
몇 가지 의문점이 사라지지 않았다.
'인체의 미(美)'를 두고 피렌체에서 마주해야 했던 또다른 얼굴이다. '완벽한 외모의 남자'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는 수식어 '다비드'. 이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모습 또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일 것이다.
<예술가 열전>의 조르조 바사리는 <다비드>를 가리켜 이렇게 평가했다.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
정말로 '실물' <다비드>는 굉장했다. 전율감이 30분이나 이어지는 바람에, 중간중간 다른 쪽으로 몇 번이고 도망가야만 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다비드> 앞을 떠날 수가 없었던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다비드>가 '이상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완벽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다비드를 바라보니 몇 가지 의문점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 <다비드>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늙은 얼굴이었다. 이야기 속 다윗은 15살 정도로 추정되는 인물로, 내 머릿속에는 여리고 보송보송한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젊은 로마 장군같은 얼굴로, 동양인이라면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앳되고 부드러운 얼굴은 온데 간데 없이, 골격이 뚜렷한 얼굴로 오만하리만치 사납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둘째로 머리와 오른손이 아주 컸다. 몇 등신 여부가 미의 기준에서 늘 중시되곤 하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남자' 앞에서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오른손은 또 제 팔뚝만큼이나 큰 '기형'이어서 계속 시선이 쏠리게 만들었다.
더 높이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비드>를 보면 평화롭고 느긋한 이미지는 사라진다. 미켈란젤로가 이 상을 조각할 때처럼 위에서 볼 수 있다면 다비드의 얼굴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콧구멍이 벌어져 있고, 두 눈이 부릅뜨여 있고, 눈썹 근육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걱정에 사로잡힌 듯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실제로 360도 회전 컴퓨터 연구에서는 느긋하고 온화한 남자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비드의 몸에 드러난 모든 근육이 긴장되어 있다. 피렌체 대학교 해부학 교수들은 다비드 상의 모든 부분이 "공포와 긴장과 공격성이 결합된 느낌을 자아낸다"고 주장한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다비드가 육체적으로 완벽하다는 환상도 깨진다. 다비드는 사실 눈이 약간 사시다. 두상이 납작하고 비율이 조금 이상하다. 손은 기형처럼 크고 이탈리아에서 '피셀로(pisello; 완두콩)'라고 불리는 그의 성기는 크기가 조화롭지 않다. 머리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피렌체 의사들에 따르면 등에는 근육 하나가 부족하다.
- 에이미 E. 허먼, <우아한 관찰주의자: 눈으로 차이를 만든다>
나 자신과 타인의 외모를 두고서는
어떤 인식과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항의가 있다.
물론 다비드의 신체 비율이 기형적인 것은 의도된 것이었으며, 소재가 '다윗'인 것에도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완벽하다고 회자되어 온 신체의 실제적 기형성과 그 기형을 보고서도 아름다운 몸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이, 나 자신과 타인의 외모를 두고서는 어떤 인식과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항의가 있다.
메인 이미지 출처: Sandro Botticelli, Primavera, Uffizi Gallery, 1477–1482
내용 작성에 참고한 자료: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시오노 나나미)>, <우아한 관찰주의자: 눈으로 차이를 만든다(에이미 E. 허먼),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