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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l 31. 2023

그런 말은 아프다

  차창 위로 쌓이는 눈을 와이퍼가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겨우 떨쳐내는 밤이었다. 재취업을 해보겠다며 서울로 이사까지 하고 주변을 정리한답시고 아이를 잠시 부모님 댁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고 나기 십상이라며 오래된 차를 겨우 끌고 기어올라왔다. 눈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내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가 병원에 있고 수술에 들어간다는 말을 전하는 주변이 어수선했다. 뇌동맥류 파열. 처음 들어보는 잘 모르는 병명이었지만 뇌, 파열… 듣는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우리 부부가 나가는 모습을 아이가 보면 따라나설 거라며 두 살 반 된 아이를 한 손에 잡고 돌이 조금 지난 조카를 업고 옥상으로 피신했던 엄마는, 지독한 두통에도 아이 손을 놓칠까 쩔쩔매며 겨우 옥상계단을 내려왔다고 했다. 다시 되짚어 달려간 병원에서 강한 진통제를 맞고 조금은 기운과 정신이 돌아온 엄마를 보자 어쩌면 마지막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는 흔한 드라마 장면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그제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엄마는 똑똑한 발음으로 울지 말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이 둘을 자리에 눕혀 재우고 밤늦게까지 바빴던 나는 잡다한 생각에 멍해있다가 곧 잠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숙면을 취하고 아침을 맞이한 내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수술 이후 중환자실로 옮기고 나니 하루 두 번 딱 15분의 면회만이 가능했다. 중환자실문이 열리면 필요한 조치를 정해진 시간 내에 다 해내겠다는 태세로 종종걸음을 쳤다. 그래봤자 환자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압박양말을 신기고 다리를 주무르는 등의 일을 마치고 의료인에게 차도를 확인할 뿐이었다. 엄마는 하루종일 쨍한 불빛 때문에 눈이 부신 데다 당신보다 위중한 상태의 환자들 사이에서 머무는 것이 힘들다며 그곳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바람이었다. 엄마가 어떤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지 가늠할 수 없어 무기력했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러 일반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일반병실에서는 하루종일 붙어있을 수 있다. 아니 붙어 있어야 한다. 간병인을 쓰는 일이 흔하지 않아서 아빠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돌아가며 간병을 했으나 엄마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것 같지는 않다. 공교롭게 때마침 취업해 버린 나는 곁에서 간병할 처지가 아니었고 가족 중 아빠만이 시간이 여유로웠지만 평생 돌봄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그 시간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모에게 맡기고 곁을 벗어난 것을 보면.


  간병은 대충 할 일이 아니었다. 환자 상태에 따라 간병인이 알아야 할 기본도 모르면서 곁만 지키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걷지 못하는 엄마를 휠체어에 앉혀 화장실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휠체어에 앉히려고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상체를 들어 올리는 순간 휠체어 바퀴가 움직이면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휠체어를 발로 멈춰 세워 사고를 모면했다. 휠체어바퀴를 고정하는 것도 모르던 내가 간병한답시고 곁에 앉아만 있었으니 미련한 일이었다.


   환갑이 되기 전에 갑자기 닥친 병마는 글자 그대로 악마였다. 나이보다 훨씬 젊고 우아했던 엄마를 딴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예전 중학생 까까머리처럼 되었고 그 머리를 감추느라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0킬로그램은 족히 빠져나가 쪼그라든 몸은 입던 옷이 모두 헛돌아서 볼품없었다. 일반병실로 옮기고도 엄마는 멍한 눈으로 어눌하게 입을 놀리며 중환자실에 있을 때 여진족과 싸우다가 꿈에서 깨곤 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들은 머릿속을 무서운 생각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지방 의료시설이 열악하다고는 하나 늦지 않게 대처한 덕분일까? 아니면 피가 굳으면서 출혈이 저절로 조금 멈춰서일까? 수술예후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여진족 운운하는 등의 헛소리를 하거나 편마비가 오는 등 흔히 병원에서 수술 전 전해주는 공포스러운 상황은 맞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뇌검사를 다시 해본 의료진은 뇌동맥류 결찰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전했다. 또다시 출혈의 가능성이 있다고. 검사기계로 알아내지 못하는 부위를 수술하면서 눈으로 보고 발견했으니 오히려 운이 좋다고. 지금까지 겪은 충분히 힘든 과정을 한번 더 반복한다는 일을 두고 머릿속은 실타래가 잔뜩 엉킨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결국 또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조금씩 삐죽삐죽 올라오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다시 밀고 또 다른 부분의 머리를 절개하고 기나긴 중환자실과 일반병동 생활을 보냈다. 살은 그전보다 더 빠져 수척해지고 다리는 힘이 다 빠져 똑바로 걸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도 엄마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미안해했다. 아이는 항상 온화하게 웃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할머니를 낯설게 생각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애들을 잘 건사해야 하는데 몸이 이렇게 돼서 끝까지 보살피지 못해 너무 속상해.
남들은 애들 다 크도록 봐주고 하는데...
난... 왜...

시간이 지나 대화가 가능해지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도 대체로 정리가 되자 엄마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마음이 고맙게 느껴지기보다는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몇 가지 장면과 엄마의 어처구니없던 넋두리 정도이다. 그때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검은 모자를 쓰고 눈밑 검은 그림자가 가득했던 할머니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어대며 품에 안겨있는 사진으로 겨우 그때를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까지 자신의 몸을 깎아가며 헌신하는 마음을 잘 모른다. 한동안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 다른 모습으로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사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때 엄마의 말은 너무 힘들어서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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