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이야기, 마가렛 애트우드>
나로 살아있는 시간
빨래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빨래방에 갈 때 입었던 옷들. 반바지, 청바지, 운동복.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 옷들, 내 비누, 내 돈, 내가 번 돈. 그런 지배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녀 이야기, 마가렛 애트우드, p.48
요양원의 최고령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침에 시설에 도착하니 요양보호사와 직원들이 모여 웅성거렸고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의 흔적은 이미 모두 지워져 있었다. 100세를 넘긴 할머니는 혈압을 재거나 욕창 부분에 간단한 드레싱을 할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면서 억울한 표정이었다. 눈에는 항상 눈물이 고여 있고 이가 다 빠져 주름지고 오그라진 입술로 연신 말을 걸지만 거의 알아듣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안쓰러움에 가까이 다가가서 입술 모양과 소리에 집중했지만, 나중에는 “오, 그랬어요”라는 얼토당토않은 무성의한 답변을 하고 그 곁을 쓱 지나쳤다. 아기의 옹알이에 기계적으로 성의 없이 답하는 바쁜 엄마처럼. 하찮고 급하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닮은 듯하지만 모두 다른 모습을 가졌다. 100세 할머니는 오랜 병상 생활로 욕창이 심해진 부분은 뼈가 드러나 있었고 몸은 형편없이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식사 시간이 되면 밥공기 가득 담은 죽을 하나도 남김없이 빠른 속도로 먹어 삼켰다. 입속으로 죽을 빨아들이자마자 녹듯이 사라졌고 바로 다음 숟가락을 기다리는 절실한 눈빛을 마주하게 된다.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데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삶이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식사 시간이 되면 할머니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죽을 넘기는 다부진 입술은 삶의 의지로 가득했다.
나는 할머니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모두가 내려다보는 눈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눈빛이 말하는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잔인하고 가차 없는 형벌을 내리는 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려고 그렇게 많이 드시냐고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았을 때 슬픔이 짧게 스쳤지만, 안도의 기분이 지배적이었다. 잘 가셨다. 굴욕적인 삶을 잘 마치셨다...
요양원 실습을 나가기 전부터 죽음을 많이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70세 사망법안, 가결>, <숨결이 바람 될 때> 등 조금씩 결이 다르지만 죽음을 주제로 한 책을 탐독했다. 병원의 수익 창출에 이용되는 말기의료행위나 치매 문제, 고령화 시대 노인빈곤에 집중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죽지 않는다> <시어머님 유품정리>를 읽으면서 호스피스 의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가족에게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읽었던 또 하나의 책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에서 이런 구절에 먹먹해졌다.
더 이상 꽃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물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206쪽)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면서 사는 것이 보통 모습이라면 치매 걸린 부모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48쪽)
자식과 달리 부모는 내일이면 더 나아질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부모(혹은 나)가 말년을 차갑고 건조한 병원에서 보내거나, 남은 날들을 시들어 가는 꽃처럼 방치된 기분으로 채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 부모님은 얼마나 산다고 새 장롱으로 바꾸고 옷을 사고 하냐며 손자들의 사진마저도 모두 돌려주며 주변을 정리하셨다. 그때 결국 나이가 들어서도 인간은 현재를 살기보다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동시에 치매라는 병 질환이 가져다주는 인지 불능상태만이 인간을 진정으로 현재에 매시간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건 아닌지 아이러니하게 느꼈다.
부모님이 싸늘하게 주변을 정리하며 아이의 사진을 돌려주신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아빠는 계절마다 백화점에서 맘에 쏙 드는 옷을 장만하고, 그보다는 씀씀이가 작은 엄마는 지하상가에서 싸게 산 여름옷을 자랑한다. 두 분 다 맨정신으로도 현재를 제대로 즐기며 살게 된 걸까? 100세 할머니는 아직도 가끔 내 눈앞에 나타난다. 팔다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잔뜩 굽힌 채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내 바람처럼 타인의 지배에 놓인 시간에서 벗어나 존엄한 순간을 향유하게 되었을지. 지독하게 신랄했던 내 눈빛을 부디 용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