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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와 함께한 제주도

혼자 여행기 1912 제주 여행기 3

by 호담

빗소리에 깨어나 새벽에 여행기를 쓰고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오늘은 날이 흐리고 집에 아무도 없다. 밥도 안 먹고 가방을 챙겨서 근처 바다 앞 카페에 갔다. 바다가 보이는 창이 예쁜 이 카페는 소품도 마카롱도 음료도 인테리어도 모두 아기자기한 곳이다. 지난번 여행 때 여기서 유튜브 내용도 짜고 글도 쓰면서 매일 여기서 시간을 보냈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아서 갑자기 시간이 났을 때 여기부터 떠올렸고 그래서 대평리로 여행지를 정했다.

커피와 마카롱을 주문하는데 카페 사장님이 여기 전에도 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지난 여행 때 매일 왔을 때는 서로 눈인사도 안 나눴었는데 역시 카페를 하는 분이라 눈썰미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 싶었다. 아닌가. 내가 매일 몇 시간씩 앉아 있다가 가서 특이했을 수도 있겠다. 이러이러해서 다시 왔다고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바다 풍경이 좋고 조용하고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들러 제주도 말로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다가 금방 가셨다. 그동안 나는 여행기를 한 편 쓰고 타로 카드를 몇 장 뽑아서 읽는 연습을 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손님이 없었을 때 내가 깐 스프레드를 보고 있노라니 사장님이 말을 건다.


"저... 타로 보시는 건가요?"

"아, 네."

"아! 타로 정식으로 봐주시고 그러세요?"

"네 저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는데 제대로 보고 있어요. 꽤 잘 봅니다. ㅎ"

"저도 봐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그런데 타로는 그냥 봐주면 안 되고 복비가 있어야 돼요."

"당연하죠."

"그런데 제가 이 카페를 좋아하니까 사장님은 그냥 봐드리고 싶은데 진지하게 봐야 하니까 커피 한 잔 리필하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좋아요. 저 그런데 친구도 보고 싶어 할 거 같은데 불러도 되죠?"

"얼른 전화하세요"


그렇게 새로 커피 한 잔이 서비스되고 몇 사람이 카페에 들어섰다. 사장님은 사업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운명의 수레바퀴 그리고 죽음

는 책을 읽을 때도 전체적인 설계도를 파악하고 세부사항을 해석하는 습관이 있어서 타로를 볼 때도 여러 정보를 참고하려고 웬만하면 10장을 깔고 본다. 왼쪽에 깔린 6장으론 무난하게 나왔다. 그런데 오른쪽 배열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을 나타내는 카드에서는 운명의 수레바퀴. 이 상황이 뒤집어질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외부의 시선으로 이 사업을 봤을 때는 죽음, 끝을 의미하는 카드가 나왔다. 무슨 이런 난감한 상황이 있지? 전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의 사장님 사업 방향을 봐주고 있는데 지금 이렇게 평화로운데 사업을 접는다고? 카드를 펼치기 전에 질문만 받고 아무 얘기도 듣지 않은 상태였다.


"이 카페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사장님과 친구의 눈이 마주치고 역시... 하는 표정이 스친다.

"네. 사실은 카페가 다음 달에 문을 닫거든요."

"네?????"

이번엔 내가 내 입장에서 본분을 잊고 당황. 왜? 왜 나의 대평리 카페가 문을 닫아? 듣자 하니 건물이 재개발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카페가 나가야 하고 1년 뒤에 이 카페를 다시 한다고 하면 좋은 조건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건물주가 제안한 상태. 여기에 대해서도 카드를 뽑아 이야기를 풀어 보았다. 내가 이 카페에 간 다음 날은 카페 휴무일이었고 그다음 날 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건물 이 상태의 카페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참으로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연애에 대해

타로를 들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날 때는 아는 사람 한 두 명 봐주고 혼자 카페에서 뭐나 끄적이다가 오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카페에 가서 테이블에 카드를 펼치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관심 있어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타로를 배운 이후 지금까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연애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계속 연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연애는 왜 하고 싶어 지고 왜 그만두게 되는 것인지. 어떤 사람이 연애에 대해 질문을 하는지. 왜 하는지. 그래서 정말 연애를 하게 될 것 같은지...



저 결혼하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은지를 물었다. 결혼을 하게 된다고 나왔다. 그런데 펼쳐놓은 어떤 카드에서도 관계를 나타내거나 감정을 나타내는 카드가 안 나왔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대로 흘러가게 두면 결혼을 하기는 한다.'라고 말했다. 최종 결론에서 운명의 수레바퀴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의지가 이 스프레드에는 전혀 없었다. 질문을 하나를 더 풀이하면서 결국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서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고 이별할 자신이 없어서 부모님 손에 이끌려 관계를 결혼으로 가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여성은 남자 친구가 자신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다는 질문을 했다. 이미 객관적인 상황은 다 알고 있었다. 남자는 돈을 안 번다. 집도 여자 집이다. 집안일도 안 한다. 애정 표현도 안 한다.


이 사람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남자 친구의 마음에선 이 관계가 이미 종결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담담한 표정으로 맞다고 관계는 이미 깨졌단다. 내가 오지랖이 넓은 것인지 그냥 자매애인지 모르겠지만 타로를 떠나서 이 사람이 정말 걱정됐다. 그렇게 심각한데 왜 결혼을 하려고 하냐니까 나쁜 말을 하기가 너무 힘들다면서 이 얘기 저 얘기하는데 내면이 너무 복잡해 보였다. 자기 내면을 한 번도 정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걸 얘기하는 것이 나쁜 말은 아니라고 오히려 서로의 건강을 위해서 용감한 얘기를 하는 거라고 말했더니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결혼 얘기할 때는 그렇게 어둡더니... 내가 더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딸의 남편이 될 사람의 금전적 정서적 상태를 체크하지도 않고 결혼으로 밀어붙이는 부모님인 걸 보면 그다지 유대가 깊은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결혼이라는 질문으로 표현된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는 아마 다른 문제일 것이다. 적어도 상대방과 진지하게 대화라도 시도해 보라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쯤 어떤 상태일까. 타로를 보고 긴 얘기를 나눈 것이 모두 다 소용없는 일이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평소대로 돌아가서 어디 용한 타로 리더가 없는지 찾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궁금하지 않은 것을 묻는 사람은
답을 얻을 수 없다.


우리 오빠랑 저는 잘 지낼 수 있을까요?

20대 중반의 여성이 한 질문이다.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는가 보다 하고 타로를 펼치려는데 옆에서 친구가 '너네 오빠 지금 어디 있어?' 이런다. '몰라. 어딘가 있겠지. 우리 카톡도 안 해.' 질문자가 친구에게 한 대답을 듣고 난 타로를 거두었다.

"타로에 이런 거 물어보지 마시고
그냥 오빠한테 카톡 하세요. "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타로한테 물어봤자 원하는 카드가 나오지도 않겠지만. 태양이 떠서 반짝거리는 카드가 나온 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 이 질문도 사실은 안 궁금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궁금한 것은 이거였겠지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우리 오빠와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저 연애운이 있나요?

지금 사업을 하는 여성의 질문이었다. 카드를 풀어보니 연애에 대한 열정은 없고 생각(소드)만 가득하다.

"지금 정말 연애를 하려고 노력할 생각 없으시죠? 그냥 이 정도 나이 됐고 이 정도 사업 운영하고 있고 지금쯤 연애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고 막 조바심 나거나 진짜 너무너무 간절히 노력할 마음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죠?" 쑥스럽게 그렇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고 싶지도 않고 귀찮고 노력을 할 생각도 별로 없다고... 그러면 좀 더 기다렸다가 마음이 정말 원할 때 움직이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맞단다.


어떤 질문은 자기가 진짜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남들 다 한다고 내가 지금 꼭 연애를 해야 하는 거냐?" 였을 것이다.


저 연애할 수 있을까요?

외모도 하는 일도 매력도 모두 괜찮아 보이는 남성분. 연애할 마음의 준비가 꽉 찼다면서 정말 만나기만 하면 절대 망설이지 않고 사귀자고 말할 수 있단다. 이런저런 풀이를 정성스럽게 했다. 자기가 원하는 모습의 여성이 있기만 하면 자기는 당장 달려 나갈 수 있다는데 이분은 지적이고 차갑고 예리하고 강한 스타일의 여성이 좋다고 했다.(카드가 그렇게 나옴) 그런데 그런 유형의 여성이 당장에 달려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날 정로로 자기 마음을 뒤흔들 매력을 쉽게 노출할 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 걸까? 구름 속에 상상으로 만든 컵을 쌓고 그 안에 온갖 것을 담고 바라보는 망상 카드가 반복해서 나온다. 연애에 생각만 많고 실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해도 아니란다. 김영랑의 시까지 동원해 가면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야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 여기 이 카드의 사람처럼 나무에 기대 있지 말고 다가오는 잔을 잘 잡으라고 조언 카드를 풀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만 한다면 연애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연애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조건만 조성되면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그 사람 대신에 내가 질문을 만들고 카드를 뽑고 싶었다.

"저 사람은 고백할 수 있을까?"


모든 타인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누구와 얘기를 하든 그 사람들의 모습엔 내 모습이 있었다. 소중한 관계의 가치를 몰랐던 20대 초반의 나,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을 모두 내면화해 버렸던 20대 후반의 나, 누구든 나타나기만 하면 정말 절대 망설이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나,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 매달릴 정도로 외롭고 병들어 있던,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나 또렷한 인식 때문에 죄책감과 자책에 시달리던 나, 가족에 대한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떨어진 화목함을 꿈꾸었던 나, 선택하고 감수하고 돌아서거나 포용하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언제나 상황이 닥칠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서 순결하고 무지한 선한 사람의 자리를 고집했던 나...


타로를 풀이하고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타로의 이미지들과 상대방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면서 그 안에서 내 아픔과 실수와 어리석음을 되새기는 시간이 찾아왔다.


2018년부터 지난여름까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나는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관계의 문제를 겪어왔다. 관계는 함께 맺는 것이고 그러니 어떤 상황이든 절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 난 사실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예측한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일들이 발생했을 때 당황했고 괴로웠다. 그것은 성실한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 통제감 상실의 충격이었을 수도 있고 무오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분노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극단까지 갔을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굴해져서라도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불안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지금의 나는 이제 그런 방식으로 내 감정을 다루지 않지만 그때의 나도 역시 지금의 나다. 그때의 이성은 지금의 내 이성에 기여했다.



느 비 오는 날에 커다란 일기장에 열일곱 장의 일기를 빼곡히 적고 나서 조금씩 달라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난 내가 내면의 언어를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에는 술술 풀어지던 말들이 자꾸만 걸려 넘어지고 흩어지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 그때의 일기를 읽어보면 정말 혼란스럽게 여러 이야기가 한꺼번에 전개된다. 난 외부로 향하는 언어는 훌륭하게 통제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 싫은 내면은 외면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 잘못과 과오 내가 불러일으킨 감정의 골, 나의 폭력성과 잔인함, 숨 막히는 원칙 주의에 대해서 낱낱이 밝히고 수치심과 죄책감을 마주하고 인정하고 떠나보내고 흘려보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치 진공 병에 가둬진 것 같은 시간을 견뎠다.


내 능력과 상관없이 난 영원할 것 같은
관계의 공백 속에 놓였다.


아주 최근까지도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질문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타로를 배우게 된 것도 타로를 보고 순식간에 이야기를 짜 맞추어 나가게 된 것도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의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추적해 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나에겐 낯 선 일이지만 그 낯 선 일의 뒷면에 익숙한 과거가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내 앞에서 카드를 뽑고 내 해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이렇게 까지 애를 쓴 상황이 펼쳐지지 못했을 것이다. 창밖에서 파도가 치는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누군가 앞에 앉아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카드 풀이에 집중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자꾸만 딴죽을 거는 사람을 앉혀 놓고 머릿속으론 '저 행동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띄우고 답을 찾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조금은 나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이 조금 달라지면 나도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정하진 않아도 그들이 표하는 감사의 대가는 이 대화를 공평하게 했고 그동안 착취적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소비하던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됐다.


제주도에서 보낸 5박 6일 동안 총 10 명의 타로를 풀었다. 질문은 이보다 더 많았고 육지에서 풀었던 타로를 다시 해석해 보기도 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여행이 끝나가니까 한동안 나를 짓누르던 그 문제가 이제 해결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제주도 있는 내내 내 계획과 상관없이 너무 바빴고 정말 얘기를 많이 나눴고 많은 사람을 새로 알게 됐다. 그리고 5일째 밤이 저물어가는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가 나와 정말 잘 지내왔고 나와의 독대를 매우 즐기며 혼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공백이 그립다. 다시 공백 많은 서울 생활 내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내 타로를 다시 뽑으며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조언을 구했던 사람들 중에는 간절한 사람도 많았다. 꼭 그 문제에서 헤어나길 바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한 해설서를 쓰고 새로운 질문을 자꾸만 다듬어 가기를 바란다.


나의 질문과 고집이 나에게 해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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