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로 숙소를 옮긴 후 첫 아침.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햇살을 받으며 동동 게스트 하우스 어머니께서 해주신 단호박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고 서둘러 옥상 건조실에 빨래를 널고 나오려는데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에 고양이가 한 마리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손가락을 내미니까 뺨을 비비고 궁디팡팡을 요구한다. 이름은 수동이. 사랑을 받아내는 데는 도가 텄다.
큰길로 나와서 종달리 버스 정류장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세화 해변으로 이동했다. 날씨도 좋고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는데 정말 따뜻해서 시폰 블라우스 위에 겉옷을 안 입어도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이 아직 문을 안 열어서 근처를 산책했다. 양식장에서 바다 쪽으로 방류되는 물길 근처에 오리들이 파티라도 하듯이 몰려 있는 모양이 귀여웠다. 그리고 한쪽에는 용천수가 졸졸졸 나오고 있었다.
용천수는 현무암 많은 제주 지역의 특징 중 하나인데 비가 오면 돌 많은 땅으로 스며들었다가 낮은 제대로 흘러 흘러 바닷가에서 다시 솟아나는 물이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거나 해도 홍수를 막고 가물 때 수원이 되기도 하는 중요한 제주의 특징인데 골프장이니 공항이니 이래저래 제주 자연이 고생이 많은 것 같다. 순리대로 가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졸졸졸 흐르는 맑은 물을 보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왼쪽은 오리들 오른 쪽은 용천수
나는 원래 회를 잘 못 먹는데 이번에 제대로 회맛을 보게 됐다. 도다리 새끼라는 새꼬시회. 제주도분들 말로는 여기가 딱 어촌 스타일로 나오는 횟집인데 양이 정말 많다고 한다. 회 한 접시에 2만 원인데 진짜 너무 배불렀다... 여럿이 오면 국물 종류를 시키면 모든 반찬과 새꼬시회 약간이 같이 나오니까 도다리회와 지리나 매운탕 이렇게 시키면 될 것 같다. 물회와 회덮밥도 있다. 중요한 건 맛있고 싸다는 것. 그리고 식당을 나오면 저렇게 전망이 훌륭하다.
서점에는 예쁘고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한 광복이가 있다. 광복이는 유기견이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누가 버렸을까... 다행히 지금은 사랑도 많이 받고 행복해 보인다.
사진에 다 담기지 않는 멋진 인테리어
풀무질은 서울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아주 유서 깊은 책방 이름이다. 독서 인구가 줄고 책 관련 사업들이 기울면서 풀무질도 경영난을 겪었는데 아주 없어질 뻔했다가 새로운 운영자를 만나서 지금은 인테리어도 바뀌고 각종 강연과 독서 및 환경 관련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서점으로 운영되는 중이다. 제주에 그 예전 사장님이 운영하는 제주 풀무질이 있다고 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풀무질에서 산 책들
실내도 너무 아늑하고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잘 마련돼 있었다. 해가 잘 들고 조용해서 잠시 쉬어가기 정말 좋은 공간이다. 난 러셀의 <게으름에 관한 찬양>과 홍나미의 <대사관저의 담장 너머>를 샀다. 요즘엔 예쁜 서점도 많고 작고 감각적인 서점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런데 sns를 하다 보면 그런 서점들에 들러서 한 두 권 쓱 읽고 중요 문장은 사진으로 찍은 걸 인증하며 책을 좋아한다고 쓴 글을 종종 읽는다. 그런 건 정말 에티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굳이 포스팅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다. 한번 방문하면 반드시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사야 하는 책방이 늘고 있는데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좋은 의도를 먹고 자라지 않는다.
따뜻한 햇살을 등에 덮고 산들산들한 바람을 맞으면서 작게 물결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풀무질에서 산 책을 읽었다. 사람이 아주 많지도 아주 없지도 않은, 모든 것이 적당한 상황 속에서 정말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성수기에 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세화는 바다가 예쁘고 주변에 적당한 맛집과 카페도 많고 산책하기 좋은 해안과 풍경이 정말 조용하고 느리게 여행하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며칠 느린 시간을 보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톤으로 칠한 어촌계 창고와 해녀 일터
세화 5일 장터를 둘러보고 편의점에서 흑당 라테를 마시며 당 충전을 하고 다시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세화는 포구가 정말 커서 아기자기한 맛보다는 잘 나가는 어촌의 느낌이 이런 건가 싶었다.
평대의 유명한 레이 식당이란 곳에 가려고 평대까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햇볕을 정말 좋아하는데 하루 종일 밖에서 햇살을 느끼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햇살의 느낌과 그 햇볕이 만드는 색과 그림자가 너무 좋았다.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는 온도나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 황금빛으로 테를 두르는 반짝임이 모두 좋았다. 노을이 지는 것을 안 놓치고 볼 수 있는 이 여정과 가만히 있어도 여행이 되는 완벽한 날씨에 온종일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평대에 도착할 때쯤 지던 노을
해맞이 쉼터라는 곳이 있는데 해물라면과 해물 파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레이 식당이 안 나와서 잘못 왔나? 싶어서 다시 온 길을 돌아왔다. 그때쯤엔 정말 배가 고팠다. 그런데 레이 식당이 문을 닫았다. 한몇 초 멍했는데 바로 아까 그 해물라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그곳으로 갔다. 처음 길을 못 찾은 덕에 바로 해물라면 파는 곳이 근처에 있는 것도 떠올린 거라며 모든 것은 다 아귀가 맞게 돼 있다고 좋게 좋게 해석하면서 기분 좋은 저녁 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