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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Feb 08. 2021

리틀 베이비 블루 필

호담서원 오픈클럽 참가자 후기

이 참가자는 외국에 거주 중이다. 처음으로 북클럽에 참여해 보았다고 했고 내 101 클래스를 통해 만났다. 짧은 첫 댓글 하나만 보고도 굉장히 진지하고 지적인 사람일 거라는 걸 수 있었다. 예견대로 차근차근 수업을 흡수하고 적용하는 과정이 놀라웠다. 내가 선호하는, 건조하게 지적인 사람이었다. 줌으로 만났을 때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집사이기까지...  

후기를 받고 너무 놀랐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다음 시즌 선정작이 된 <사랑의 알고리즘>과 통하는 생각을 후기로 보내와서 설레기도 했다. 긴 글이지만 너무너무 소개하고 싶은 후기. 클래스 101을 통해 만난 분들을 생각하면 정말 더더욱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 한 자리 남은 온라인 북클럽에 들어오시면 우리와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더 많은 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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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담서원 오픈클럽 <리틀 베이비블루 필>
참가자 후기

   전공 분야는 아니지만 관련 분야라서 인공지능 기계 학습을 잠깐 겉핥기로 배웠다. 여러 가지 기계 학습법이 있지만 알파고로 유명한 딥러닝의 기초가 되는 인공신경망은 인간의 뇌 신경망 구조를 모델링한 회로를 짜 놓고 끊임없이 데이터를 집어넣어 학습시킨다. 가령 쇼핑몰의 상품 평점과 사용후기를 지속적으로 학습시키면 사용 후기만 읽고도 이 글을 쓴 사람이 긍정적인 마음인지 부정적인 기분인지를 기계가 알아낼 수 있다. 혹은 추가적인 사용자 정보를 더 넣어, 어떤 사람이 진짜 고객이고 어떤 사람이 평점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지, 기계가 쓴 사용후기는 무엇인지 등등 다른 방향의 학습을 시킬 수도 있다.

   처음에 적은 양의 데이터만 학습했을 때는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수준으로 나이브한 식의 판단 모델밖에 없지만 (가령 ‘좋아요’가 들어가면 긍정적 감정, ‘실망’ 이 들어가면 부정적 감정), 점점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할수록 더욱 복잡하게 발전된 모델로 문맥적인 해석까지 가능해진다.

일정기간의 학습단계를 거치면 이제 이 인공지능을 실제로 사용하게 되는데 가령 사용자의 사용 후기를 바탕으로 만족한 사용자에게는 연계되는 상품을, 불만족한 사용자에게는 다른 상품을 추천하는 등 학습된 판단을 이용하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학습하여 모델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한번 학습을 시켜 놓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입력을 받아들여 발전을 시키는 이유는 이전에 학습된 내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중률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어휘도 변하고 사용 후기를 쓰는 양상도 변한다. 그래서 최신의 입력값이 더 큰 비중을 가지고 사고 모델에 더해진다. 딥러닝의 경우 모델 자체가 입력값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판단 또한 학습하도록 만들어진다. 가령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잘 받았습니다.’와 같은 사용 후기는 별 의미가 없으므로 무시하도록 하는 모델을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다.

   사람의 기억과 학습으로 따지면, 입력들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경험들, 모델은 이로 인해 만들어진 우리 머릿속의 사고 회로라고 볼 수 있다. 어렸을 때는 보고 들은걸 그대로 흉내 내는 단계에서 점점 많은 경험들을 할수록 우리는 복잡한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반응하게 된다. 예전에 만들어진 사고 회로는 시간이 지나 잘 쓰이지 않게 되면 점점 잊히고 새로 들어온 입력들이 기존 모델과 합쳐져 조금씩 사고체계가 변화한다. 어떤 경험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여 생각을 바꿀지, 어떤 경험은 관심이 없어 무시할지도 우리의 사고 체계가 정해준다.

   새로운 입력이 들어오면 기계학습의 경우 현재의 입력값에 기존에 학습한 사고 모델을 바탕으로 해석하여 적절한 출력을 하는데, 사람으로 치면 상황을 기존의 사고 모델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에 해당한다. 현재 입력값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가령 서점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던가 하는 느긋한 상황에서는 외부의 입력보다는 평소 사고 모델이 더 큰 비중을 가지지만, 갑작스레 차가 달려드는 상황이나 소중한 사람과의 갑작스러운 이별과 같은 상황에서는 상황이 가지는 힘이 매우 커서 사람에 따라 다른 사고 모델의 차이는 많이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기계학습에서 더 큰 기록장치와 연산장치를 사용하는 모델은 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우 복잡한 모델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초반에 어느 정도 학습 모델을 가이드해주면 더욱 빠른 학습이 가능한데, 이는 사람으로 따지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나거나 조기 교육으로 형성되는 학습능력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잘 만들어진 모델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 이것을 따로 판매하는 서비스도 있다.

   그런데 기록장치, 연산장치와 같은 하드웨어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계학습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설정값 조정이다. 가령 얼마나 빠른 속도로 옛 학습내용을 잊어버릴 것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모델을 수렴시킬 것인가, 예상과 반대대는 결과가 나왔을 때 얼마나 신속하게 모델을 수정할 것인가, 판단을 내릴 때 현재의 입력값과 이미 학습된 사고 모델의 비중을 얼마로 가져갈 것인가 등을 기계학습 설계자가 수치로 정하는데, 소위 ‘손맛’이라고 하는 이 수치 값들이 최종 모델의 질을 크게 좌우하며 경험 많은 설계자의 노하우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처음 기계학습을 배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이 설정값을 잘못 정하는 것이다. 만약 너무 빠른 속도로 모델을 수렴시키도록 하면 몇 개의 데이터만 가지고 섣불리 결론을 내버린 편협한 모델이 될 것이고 너무 느리게 수렴시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판단기준이 서지 않은 우유부단한 모델이 될 것이다. 최신 입력값의 중요도를 너무 크게 설정하면 상황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귀가 얇은 모델이 될 것이고, 반대로 너무 작게 설정하면 과거에 머물러 적응력이 떨어지는 모델이 될 것이다.

   우리의 뇌는 아마도 정말로 사려 깊은 창조자가 한 명 한 명 설정값을 섬세하게 조작해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서로 다른 경험이 더해져 서로 다른 모델이 형성이 되고 이것이 사람들이 모두 다른 이유일 것이다.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다른 사고 모델은 각각의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할지, 똑같은 상황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할지, 그래서 어떻게 서로 다르게 반응할지 결정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형성된 그 모델이 ‘나’ 그 자체이고, 시간이 흘러 모델이 조금씩 바뀌어 감에 따라 ‘나’는 계속해서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일지 모른다.

   소설에서의 상황은 약물로 인해 이 설정값들이 크게 바뀌어버린 상황이다. 자연스러운 망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고 어떤 입력을 중요하게 생각할지에 대한 모델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중요하지도 않은 학창 시절 앞자리 앉은 애의 양말의 때를 평생 기억하고, 중요한 입력이어야 할 현재 내가 차를 몰고 있는 도로의 상황이 무시되고 있다. 본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사건들의 중요도가 약물에 의해 뒤죽박죽이 된 상황이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큰 변화가 설정값들에 주어진다면 나의 사고 모델은 온전할 수 있을까? 그때의 급격한 모델 변화는 과연 ‘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연속적인 것일까? 더욱이 소설 속에서의 상황은 과거의 특정 입력이 사라지지 않고 뜬금없는 시점에 마치 새로운 입력인 양 계속해서 반복해서 들어오는 상태로 보인다.

   학창 시절 앞자리 학생의 양말의 때와 지금 내 앞으로 달려드는 트럭이 같은 중요도로 인식되고, 옛날에 봤던 TV 프로그램이 배우자의 죽음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때, 어떤 입력이 중요한 입력인지 판단 내리고 그를 바탕으로 사고해 행동을 결정하는 우리의 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이렇게 바뀌어버린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과거 현재의 입력의 홍수 속에 뇌는 마치 설정값이 잘못된 인공지능처럼 사고 모델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어쩌면 각각의 입력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식으로 행동할지 모른다. 혹은 극심한 피로를 느껴 모든 적극적 반응과 학습의 의지를 상실하고 귀를 닫고 눈을 막은 채 고집스레 편견과 광신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베이비 블루 필은 발명되지 않았지만, 많은 입력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점에서 소설 속 상황과 비슷하다. 책 한 권에 의지해 자식을 키웠던 우리 부모 세대와는 달리 지금은 육아와 교육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새로운 육아법이나 교육법이 트렌드가 되고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걸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와 같은 입력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 번이라도 아동 교육에 대해 검색했다가는 유튜브의 추천 동영상이 온통 수많은 전문가들의 아동 교육론으로 가득해진다. 멍하니 이것저것 클릭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은 떠도는 정보들과 나도 남들처럼 뭔가를 해야겠다는 조바심으로 채워진다.

  시간에 따라 내 sns 타임라인은 온통 달고나 커피를 만드는 영상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와플 기계로 별걸 다 눌러먹는 영상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보고 있으면 나도 왠지 당장 팔이 빠지게 달고나 커피를 저어야만 될 것 같고 와플 기계를 사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예능에서 어떤 연예인이 무슨 웃기는 말을 했다는 뉴스와 한 작가가 굶주림을 못 이기고 고독사 했다는 뉴스가 나란히 뜨고, 한 정치인이 sns에 올린 재미난 글이 그 사람의 비리보다 화제가 되기도 한다.

   진짜로 나를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의 조언과, 뭐 하나 팔아먹어보려는 사람, 나를 조종하려는 사람이 같이 접근하고, 화려한 이력서로 수많은 분야의 전문가 자격이 있다는 사람이 어려운 용어들을 섞어 쓰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들이 sns에서 공유되고 떠받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사고 모델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고 하나하나의 입력들을 사고 모델을 통해 처리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판단하고, 적절하게 반응하고, 또 필요하면 그 결과에서 학습하여 사고 모델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피로한 일이다.

   또 하나의 환멸 나는 뉴스일 뿐이라고 냉소하고 지나가지 않고 제대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는 일, 내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불합리를 술이나 게임 중독으로 도피해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남들 다 반응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는 일. 그러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마음을 열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을 바꿔나가는 일. 이런 피곤한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뇌는 상황에 즉흥적으로 반응하기 급급하거나 더 이상 학습의지를 상실하고 로봇처럼 똑같은 소리 똑같은 행동 패턴만 보이게 될는지 모른다.

   그렇게 살면 왜 안되는가, 왜 꼭 피곤하게 사고 모델을 갈고닦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남편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말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더 이상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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