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두 번째 제주도 여행 1
여행 직전까지 아무 준비도 못했다. 게을러서 그렇기도 했지만 마땅히 가고 싶은 곳도 없어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날짜는 다가오고 일은 바쁘고... 꼭 제주도를 가고 싶기도 했지만 제주도라는 곳이 나에겐 추상적인 의미였던 것 같다. 출발 며칠 전에 북촌 하늘금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정하고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당일 아침까지 분주하다가 공항에 왔다.
비행기가 뜰 때쯤 비가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 좋게 비상구 좌석에 앉게 됐지만 한 시간 내내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옆에 앉은 아저씨의 떠드는 소리에 약간 신경을 긁히면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안과 의사의 아내가 같이 격리 수송차량에 올라탈 때쯤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도의 날씨는 화창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더웠다. 95번 버스를 타고 탐라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 201번 버스로 환승하고 한참을 달렸다. 오른쪽 차창으로 땅끝까지 내려 안은 무지개가 따라왔고 온갖 종류의 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오늘 노을이 정말 아름답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할 때쯤... 유독 이번 여행에 몸이 무거워진 빨강이 녀석과 제주 북촌리 정류장에 내렸다. 정류장에 내려 뒤를 돌아본 순간,
어떻게 하늘이 저렇게 아름다울까. 필리핀에서 봤던 하늘처럼 정말 다채로웠다. 은은한 금빛이 구름의 사이사이로 흘러넘쳐 뻗어 나가고 저 멀리서 해가 지면서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떠날 때나 알게 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내내 찬란했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마을 굽이굽이 돌아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낮은 감탄사가 내내 흘러나왔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운치 있는, 배가 닿는 작은 항과 물이 들어왔다 나가서 더더욱 분위기 있는 바닷가 마을... 그냥 여기서 밤낮 머물다 가도 되겠다 생각하니 계획 없이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제주 북촌으로 이끈 코삿헌에 밥을 먹으러 나섰다. 내가 여기로 밥 먹으러 간다니까. 게스트 하우스의 두 스탭분이 따라나섰다. 매 끼니 혼자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이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1년 전 엄마와 여행 왔을 때 스치듯 뵀던 김은영 님과 여행 후 페친을 맺고 나서야 음식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임을 알았다. 아름다운 음식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젠간 밥 먹으러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드디어 코삿 주방에 읹았다. 꼭 영화 속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사진으로만 보던 요리를 처음 본 두 명의 남성분과 같이 먹으며 제주도 이야기를 들었으니
오늘 이미 이 여행은 성공이다.
식사가 나오기까지 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여유 있게 시간 잡고 가는 것이 좋다. 식사가 준비되자 이쁜 고양이가 자기도 달라고 엄청 강력하게 야옹거린다. 식사하며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 문화와 운영 철학(?) 같은 것을 들었다. 게하마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파티를 통해 손님을 끌거나 건수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고 있다고... 북촌 하늘 금 게스트 하우스는 좀 조용조용하면서 대화를 깊이 하는 문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일단 위치한 마을 자체가 워낙 조용하고 운치 있어서 그래야 상생하지 싶었다. 숙소 잘 골랐다~ 내일 뭐하냐고 물어들 보셔서 그냥 아무 생각 없다고 했더니
진짜 여행 오셨네요
어둑한 골목을 지나 동네 유일한,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나무 선반에 과자 봉지들이 진열된, 맥주는 카스만 판다는 구멍가게를 지나 '집'에 왔다. 어제 로스팅했다는 커피를 내려 예쁜 잔에 담아 주실 때쯤 바람이 몹시 불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늘 손님은 꼬마 여자 아이와 그 아이의 성격 좋고 친화력 갑인 이모 그리고 나. 사장님이 아이를 위해 <센과 치히로의 모험>을 빔으로 상영해 주셨다. 밖에선 비가 오고 있고 우린 가장 편안한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사장님께서 가져다 주신 따끈한 팝콘과 간식과 맥주를 받아먹으며 영상을 감상했다. 같이 보는 이들의 일본 만화영화에 대한 식견이 대단하다. 이건 뭐... 호텔에서도 느끼지 못할 서비스와 문화 아닌가. 너무 편안해서 벌써 이틀은 지난 느낌이다.
커피 마실 때 코삿헌 사장님께서 내일 아침 같이 요가 가겠냐고 거기 갔다가 아까 화제에 오른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과 차 마실 수 있을 것 같다고 메시지기 왔다. 저녁 산책 같이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못 나갔다. 내일은 여기 스탭분이 배우시는 서핑에 1일 수강료 내고 따라가기로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이런 거구나... 엄청 흥미진진하네 친절한 게스트 하우스 분들과 옆 침대에서 잠드신 여행객들과 뭔가 분위기와 현명함이 느껴지는 요리 연구가님께 무척 감사하다.
내일 상영될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로 정해주셨다. 아... 여기 오길 잘 했어. 밖엔 비바람 소리가 들리고 자리는 따스하고 몸은 노곤하다. 혼자 오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