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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여행의 필수품

혼자 떠난 두 번째 제주도 여행 2

by 호담

새벽 4시가 넘을 때까지 빗소리에 신나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조식 시간에 맞추려고 8시에 맞춘 알람은 -분명히 울렸다는데-난 깔끔하게 못 들었다. 감고 그냥 잠들어 부스스해진 머리와 부은 눈 덕에 '누구세요' 소리 들으며 아침 식사를 했다. 여전히 화제가 끊이지 읺는 사장님과 적당히 조용한 원엽 님, 그리고 하룻밤을 함께한 이모 조카 커플 ~ 바나나와 견과류, 치즈,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 어제 로스팅했다는 원두로 내린 드립 커피, 우유와 주스, 시리얼, 과일~

보통 천오백 원 안쪽에 맞추는 게하 조식과는 비교가 안 되는 북촌 하늘금 게스트 하우스의 조식
몇 달 만에 서핑하기 좋은 파도가 찾아왔다는 제주도의 아침

얼마 전부터 서핑을 배우고 있다는, 사장님의 처남이자 스탭인 장원엽님과 함께 10시쯤 집을 나섰다. 원래는 비가 종일 올 거라고 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쨍한 햇살과 많은 구름,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여행의 두 번째 정점을 찍는 듯했다. 오늘 서핑을 배울 곳은 이호 태우 해수욕장. 버스를 타고 어제 온 길을 거슬러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환승해서 가는 동안 엽님의 아이폰에 든 음악을 나눠 들으며 차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에 넋을 놓느라 지루한 줄 몰랐다.


엽님은 수다쟁이도 아닌데 무뚝뚝한 것도 아니어서 내내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있다. 필요할 때 말하고 아닐 때 각자 할 생각 하고 보고 싶은 거 보고... 어제 식사 때는 못 나눈 얘기를 간간이 나누기도 하고...


여기 여행 와서 정말 좋았던 것은
아무도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말과 관련된 어떤 일들을 한다는 것,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풀어놓는 순간 이어질 화제와 흐름들이 대화를 수월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난 그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멈칫멈칫 난 단어를 고르고 문맥을 다듬느라 조금 주춤거리지만, 나만 잡아낼 수 있는 휴식과 평안의 가닥을 붙들 수 있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전적으로 난 누군가의 도움과 배려와 이끎 속에 흘러가고 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달콤한 무책임, 아무도 나의 지시나 조언을 구하지 않고 반대로 강요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데 혼자가 아니다. 난 입을 다물어도 되고 열어도 되는데 주변이 온통 '무심의 경지에 이른 전문가'다. 이것이 얼마나 호강인지 삶의 무게가 없었다면 몰랐겠지...


또 다른 전문가인 강사님께 넘겨져 3시간 정도 물에 있었다. 서울에 두고 온 트레이너 선생님이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물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져가며 내가 얼마나 서핑에 재능이 없는지 체험했다. 세 명의 영화 스탭 일을 하는 20대 초반 유쾌한 여성 분들과 이제 강습 이틀째라는 다른 여성분과 동지애를 나누며 ~


서핑에 대한 글은 따로 정리하기로..

오는 버스에서 엽님이 함덕에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것도 좋을 거라고 제안했었다. 11시에 왔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3시가 넘었다. 배도 많이 고프고 몸도 혹사해서 어떡할까 고민하는데 간다고 하면 같이 가 주겠다고 하신다! 길만 알려줘도 감사한데 같이 다녀 준다니... 둘 다 움직이는 거에 환장한 사람처럼 밥도 안 먹고 그 길을 걷기로 했다. 일단 아무 버스나 타고 다시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엽님의 전 직업과 게스트 하우스 운영에 대한 생각도 듣고 제주도 정착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얘기가 흘러서 신상 쇼핑의 무모함과 서비스업의 고통, 영화 보는 취향 같은 대화도 나눴다.



함덕 가는 버스를 타는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 휴게소에서 어묵을 먹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인 건가. 맹세컨대 내 평생에 가장 맛있는 어묵이었다. 함께 해 주심에 감사하며 내기 쏘고 ( 2인 8 꼬치 3천 원 ) 엽님이 입가심의 캔음료를 쏘고 ~ 흡족한 애피타이저에 기분이 좋아서 함덕 해변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아름다웠던 함덕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은 생략...


사장님과 게하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사장님께 김밥 사가겠다고 전화했다. 기대에 차서 찾아간, 줄 서서 먹는다는 분식집은 문을 닫았고 차선책 분식집은 밥이 없다며 김밥 못 판단다. 올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제주도 음식점의 도도함. 그리고 그때마다 느끼는 존경심과 부러움.


줄서서 먹는다는 김밥집
밥이 없다고 거절한 분식집
서핑의 흔적 , 수트 바깥이 피부는 위험해!


김밥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시 들어선 함덕 해변 한 켠에선 야외 결혼식 콘셉트의 세트가 꾸며지고 있었고 한쪽에선 석양 직전의 햇살을 받으며 서핑이 한창이었다. 이제 서퍼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심이 든다. 오늘 서핑 수업의 결과는 이것 만으로도 성공이 아닐까. 구체성을 획득한 선망과 부러움...

바로 이어진 둘레길 걷기는 엽님 강력추천 시크릿 코스를 거쳐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내내 감사의 말들이 터져나오는 걸음걸음. 양 옆에 무성하게 우거진,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풀들, 바람에 쓰다듬어진 쏠린 나무들, 바다, 파도, 해... 사진으로는 담아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직접보면 더욱 장관인, 바람이 쓰다듬은 절벽

19 코스와 만나는 지점에서 내려다본 북촌리 저편으로 풍차들이 나란히 보였다. 하루가 이렇게 꽉, 그것도 운동으로 찰 줄이야. 마치 전지훈련 온 운동선수 같은 하루를 마치며 집에 와보니 사장님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밥이 없다는 것에 무척 무척 무척 상심하심... 김밥과 딱 세트로 완벽한 메뉴를 준비한 거였다면서... 아!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어서 너무 아쉬웠다.

태어나 본 중 가장 정갈한 비빔면
고급진 국물 떡볶이
게스트 하우스 테라스에서 본 일몰

식사 후 사장님이 내려준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며 빨간 초롱 의자에 앉아서 잠깐 책을 읽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거실 겸 카페는 조용했다. 이 시간이 정말 좋았다. 저녁 8시가 조금 넘어서 어제 식사로 인사한 코삿헌 사장님이 영화 보러 오셨다. 둘러앉아 팝콘과 과일을 먹으며 영화를 감상하고 11시까지 이야기를 나웠다. 제주도 출신 요리연구가와 춘천 출신 학원 강사와, 해운대 출신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이 모여서 신기하게도 많은 얘기를 진지하고 즐겁게 나눴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점이 한 구석은 있는 사람들이 제주도에 모이지 않나 싶다.


제주도에 올 때 정말 필요한 건 정작 내 안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 모이기 전까지 보낸 각자의 치열한 일상과 고민들... 그것이 없는데 혼자 떠난다고 타인과의 접점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혼자만의 여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치열한 삶을 살았어야 할 나였나 보다.


영화 얘기는 다른 글에서...


오늘은 6인실에서 혼자 잔다.

중간에 한 번 저장을 잘못해서 다시 정리하느라 힘들었다. 오기 전에 나와 약속한 거니까 쓰긴 꼭 써야 했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오늘 1일 가이드로 큰 은혜를 배푸신 장원엽님 명함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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