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님은 예비군 훈련 가고 비수기라 게스트가 없어서 조식 먹는 사람은 나 혼자였는데 고기 안 먹는 나를 위해 사장님이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주셨다. 시나몬을 넣고 졸인 사과를 넣은 샌드위치, 바나나와 치즈에 건포도를 넣어 구운 샌드위치를 쌓아 놓고 오늘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핸드 드립 커피, 우유, 자몽주스와 몇 가지 과일을 너무 심했다 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테라스를 나가보니 숙소 앞바다가 유난히 반짝인다. 오늘 자외선 지수가 최근 들어 최고란다. 아무래도 올레길 걷기는 무리다.
켜켜이 쌓인 샌드위치 진짜로 다 먹었다고 놀림받음 허~
바람도 심하고 햇볕도 강한데 함덕 해변은 어제 다녀왔으니 오늘은 한가로운 여행객 놀이나 할까 하고 좋아하는 옛날 음악을 틀어놓고 초롱이 의자에 앉아서 굴러다니면서 책을 읽다가 SNS를 하다가 사진을 찍다가 바다를 바라보다가 자다가 깼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무료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만약 집이라면 어떨까.
바다가 매일 있으면 바다가 좋은 줄 모르고 올레길이 항상 저기 있으면 언젠간 걸으리라는 생각에 방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달콤한 이 여유로움이 어느 순간, 지루하고 답답한 권태가 되겠지... 여행객을 매일 맞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집이 여행지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 처음 서울에서 독립했던 몇 개월, 마치 낯선 외국으로 여행을 온 듯한 기분으로 살았던 것이 생각났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설렜지만 결국 당연함이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사장님은 끊임없이 커피와 음료수와 간식을 서비스해 주셨다. 이 감사한 서비스도 일상이 되면 당연한 것이 되고 성가신 것이 될까... 게스트 하우스도 또 하나의 사회, 누군가가 친해지고 조금씩 서로의 삶과 가치관을 나누게 되면서 무한한 친절과 이해는 약간의 부담과 의혹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다가 또 다른 낯선 곳을 바라게 되고... 이곳에서 만난 모든 낯선 것들 역시 익숙함이 될 준비가 된 것들... 그러니 그런 것을 깨닫고 나면, 일상이 지겨워서 여행을 온 사람들은 돌아갈 때쯤 우울한 자기를 만나게 될 수도 있겠다.
영원히 설레는 여행지는 세상에 없다. 익숙해지자마자 그곳은 집이 돼버리니까...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이 설렘이나 화려함이 아니라면 그 여행 끝의 우울함이란 것이 없지
않을까. 이곳에서 나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이어간다면 온갖 기대를 쏟아붓고서 실망하는 일방적인 연애 같은 감정 소모는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내일은 더치를 내려서 담아주기로 하심
예비군 훈련 갔던 어제의 1일 가이드 정엽님이 돌아오고 사장님과 나 셋이서 함덕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원래 가려고 했던, 블로그 타서 유명해진 카레집. '모닥식탁'은 대기 번호가 너무 길어서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에 있는 '홍석이네 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제육 2인분, 순두부 하나, 부추전 하나. 어제 받은 가이드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로 내가 쏘기로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지갑을 두고 와서 사장님이 선결제해 주셨다.(현금으로 갚음) 가격도 6천 원 ~ 7천 원 대로 저렴한데 맛이 정말 좋았다. 특히 순두부는 먹어본 중 가장 담백하고 깊은 맛이었다. 해물맛이 깊으면서 칼칼한데 전혀 짜지 않고 깔끔한 맛. 함덕 해변에 갈 땐 이제 여기서 밥을 먹어야겠다. 매일매일~!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유유자적한 시간, 게스트 하우스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색칠 공부도 하고 낮잠도 자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패드로 하는 색칠 공부를 홀린 듯이 하고 나니 저녁이 되어 다 같이 신상 라면인 '드레싱 라면'을 먹었다. 오 정말 맛있었다! 누들 샐러드 맛!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어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갔던 젊은 이모와 어린 조카 커플이 돌아왔다. 창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조카 아가씨의 뒷 모습
나와 이모 조카 커플은 마을 어귀의 현무암이 있는 작은 바다 끝에서 노을을 봤다. 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해가 지고 나니 하늘이 점점 핑크빛이 되어간다.
저녁 휴식 때 그리고 휴식도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가서도 우리가 이모님이라 부르는 젊은 여성분과 얘기를 좀 했다. 일본에서 8년 살다가 직장 그만두고 인도네시아의 섬에서 장기간 여행을 하다가 만난 미국인과 열흘 만에 결혼하고 1년 반을 같이 여행 다니다 미국에 정착했다고 한다. 잠깐만 얘기해도 다정함과 쾌활한 친화력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과시적이지 않은 차분한 행복이 느껴져서 보는 나도 행복했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어린 조카를 재우고 침대 등만 켠 채 새벽까지 얘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각자 조용히 하루를 정리 중이다.
오늘 하루 한적한 시간을 보내며 가족과 선의와 경계와 사랑과 주체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디까지 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가끔 다시 못 볼 사람들과 내면의 진지한 얘기를 하곤 할까. 문득 '경계에 대한 보장이 곧 여행의 매력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서로 가까워져도 친가족 같기를 바라진 않는다. (심지어 가족조차 경계를 넘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보장받아야 하는 것은 '혼자 있을 권리'가 아닐까. 그것이 친절과 익숙함이라는 지우개로 지워져 버리면 여행은 그 매력을 잃고 마는 것 같다. 그것을 지켜주는 충만한 안정감과 자유로움이 여행지의 매력 아닐까.
벌써 몇 줄을 계속 졸면서 썼다가 졸다가 실수로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제 좀 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