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두 번째 제주도 여행 4
다섯 시간 정도 잤는데 가볍게 눈이 떠졌다.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두 시간이나 남았다. 옆 침대의 게스트인 이모님은 벌써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다. 서핑 후 부스스하게 나타났던 어제와 달리 좀 '인간다운 꼴'을 하고 조식 먹으러 갔다. 오늘은 바람이 잔잔하고 햇살도 적당하다. 문을 열기도 전에 빵 굽는 냄새와 소시지 굽는 냄새가 향긋하다. 장기 투숙객들이 나가는 날이라 그런지 유독 더 신경 쓰신 것 같은 아침 상차림.
1일 가이드 역할을 해줬던 엽님은 꼬마 아가씨한테 톰과 제리랑 핑크팬더 타투를 보여주며 놀고 우리는 여유롭게 게스트 하우스와 여행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난 끼어들 수준이 아니라 주로 듣기만 했다. 이모님과 사장님은 워낙 여행 베테랑이라 듣고 메모할 화제들이 넘쳐난다. 저분들의 여행 역사를 들으니 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던 것만 보며 산 것 같다. 여유로운 아침식사와 대화... 꼬마 덕분에 끊임없는 웃음소리. 무엇이든 정리하기 좋은 아침이다.
두 사람은 1시 비행기라 먼저 나가고 2시 30분 비행기인 난 날씨가 아까워서 마을 산책을 나섰다. 게스트 하우스 왼편으로 함덕 서우봉까지 쭉 예쁜 길이 이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오른쪽으로 잔잔한 물소리가 들린다.
물에서 노는 한 쌍의 오리, 먼저 인사해 주신 올레길 관광객, 낚시하시는 남자 어르신, 트랙터를 몰고 가는 여자 어르신을 만났다. 밀물과 썰물의 오고 감을 짐작케 하는 현무암 지대가 보였다. 하늘은 옅은 물감으로 선을 긋고 입김을 분 듯한 투명한 구름들이 흩날려 있었다. 바람에 자꾸만 모자가 벗겨졌다.
첫날 저녁 먹었던 코삿 사장님께서 여행 내내 어디 어디 가겠냐고 연락도 주시고 챙겨주셔서 무척 감사했었다. 원래 오늘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비행기 시간이랑 안 맞아서 못 간다고 연락드린 상태였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인사는 하고 와야겠다 싶어서 첫날 하늘 금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 따라 걸었던 기억을 더듬어 코삿을 찾아갔다. 이 마을 자체가 워낙 조용하고 깨끗해서 찾아가는 시간도 한가롭고 아기자기했다.
원래 북촌으로 여행지를 잡은 이유는 함덕 해변과 코삿헌 때문이었다. 코삿헌 사장님 김은영 님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5월 엄마와의 여행 때였는데 당시의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의 부탁을 받고 엄마와 나를 제주공항에서 함덕까지 그냥 태워주셨었다. 그때 참 목소리가 좋으시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야 페북을 통해 요리하는 분인 줄 알았다.
페북에서 사진으로만 보는 이분의 요리는 자연에서 태어난 것 같이 보였었다. 예쁘고 건강해 보이고... 고급 요리를 내는 게스트 하우스.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가장 걱정되고 부담되는 문제가 밥인데다 난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입맛도 아니라서 코삿헌 근처로 여행을 계획했다. 페북 페이지를 통해 코삿에 지붕이 올라가고 벽에 와인병을 넣어 꾸미고 파란 대문이 달리고 메뉴가 계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떤 곳일지 상상했었다. 그런데 하필 월화가 쉬는 날이라 첫날 저녁만 겨우 시간을 맞춰 갔다. 그곳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예쁘고 아늑했다. 첫날 마당에서 본 일몰도 정말 멋졌다.
음식이 얼마나 맛있을까 상상해왔는데 ㅡ맛은 물론이고 ㅡ 음식이 향기로웠다. 음식을 향으로 먹는다는 것이 이거구나 싶다. 드레싱 하나에도 여러 맛이 순차적으로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재료가 좋은 전문가의 맛이 이런 건가 보다. 아기자기히고 깔끔한 분위기와 맛과 향의 정갈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시간 내서 가 보시길...
선생님은 무척 반겨주셨다. 몇 시 비행기냐 얼마나 시간이 있냐 아침은 몇 시에 먹었냐 하시더니 샐러드라도 먹고 가라고 기다리라며 주방으로 가셔서 서둘러 상을 차리셨다. 밤에 본 것과는 또 다른 식당 구석구석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식당 건너편 별채에는 프랑스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부부가 아기와 함께 장기 투숙 중이었다. 가끔 마당을 오가는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재료 손질과 요리 보조를 해 주시는 유쾌한 여성분과 셋이서 식사를 (나는 오늘 두 번째) 했다. 아침에 땄다는 버찌가 들어간 샐러드, 뒷마당에 감귤나무에서 수확했다는, 껍질이 특히 맛이 좋다는 귤로 만든 드레싱 소스, 감자 으깬 건데 무척 쫀득 거리면서 고소한 요리, 콩요리... 사실 다 무척 향기롭고 맛났는데 내 수준으론 재료가 뭔지 어땠는지 묘사하기가 참 힘들다... 향기롭고 식감이 좋은 요리들이었다.
휴대폰 하나 들고 터덜터덜 찾아간 바람에 결제수단이 없어서 나중에 계좌로 식비를 보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안 받으신단다. 아... 이게 무슨 복인지. 정말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여행 내내 얼마나 얻어먹고 다녔는지... 두 분은 코삿 사진과 요리 사진들을 보고 좋아라 하신다. 나중에 보내달라면서. 이쁘게 찍었다고 ^^ 오늘 아침 먼저 떠난 숙소의 이모님도 코삿 선생님도 짧게 만나기엔 너무 아쉬운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일정의 여행에서 아쉬울 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거...
돌아오는 길에 동네 유일한 구멍가게를 지나갔다. 다음엔 꼭 들러서 여기 주인 할머니 지정 품목들을 구입해 봐야지. 마침 물건 들이는 중이셔서 인사하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근처 작은 부두와 바다를 둘러봤다. 곳곳마다 어쩜 이리 깨끗할까
짐을 다 싸고 나오니 사장님이 어제부터 내린 더치커피를 제주 삼다수 통에 담아 주셨다. 아! 숙박비를 커피로 다 돌려받은 느낌이다. 비수기 연박 손님에게만 주는 특혜라며 괜찮다고 하신다. 난 철제 초콜릿 통에 담아간 간식을 드리고 왔다. 덕분에 배고플 새가 없었으므로 가져온 그대로 드렸다. 사진 잘 찍으시는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기념 촬영을 해주셨다. 어제는 서핑 여파로 '누구세요'였는데 오늘은 상태 괜찮다며 너스레를 떠신다. 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신기한 장비로 신기한 사진을 찍고 달달 달거리는 빨강이와 마을 어귀로 나왔다.
내가 뭔가 불안해 보였는지 마침 길을 건너오시던 어리가 허연 어르신께서 멈춰 서서 안 가시고 멈칫거리신다. '공항 가는 버스...' 까지만 말했는데 저기로 가서 타라며 얼른 알려 주시고 환히 웃으신다.
이곳은 천사들의 마을인가 뭐 이렇게 각본이라도 짠 듯 순간순간이 감동스러울까.
지난번 비행기 놓칠까 봐 영화 찍듯 허둥대던 기억이 있어서 여유 있게 나온 탓에 공항에 일찍 도착했다. 2시 30분 비행기인데 12시 도착. 북촌리 숙소에서 출발한 지 50분 만에 공항까지 올 수 있다. 버스도 꽤 오래 기다렸으니 1시간 잡으면 넉넉하다. 다음엔 11시 오픈 브런치를 편안히 먹고 올 수 있겠다. (당연히 제값 내고!)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녀올게요' 하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기 싫거나 또 가서 일할 걱정에 우울하지도 않았다. 매일 새벽 4시까지 꾸벅거리며 애써 하루를 정리하고 내 의식을 따라가느라 애를 쓰면서 알아낸 것이 있다.
여행에서 나를 마주하는 연습을 못한다면 나도 없고 내가 없으니 나와 만나줄 타인도 없다는 것.
어디선가 읽었을 수도 있고 들었을 수도 있는 이 빤한 명제가 무슨 뜻인지 난 여행에서 돌아와 꿀잠을 자다 문득 눈을 뜨고 어딘가를 응시하다 깨달았다. 혼자 떠나는 이유는 그래야 더 많은 타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행지에서 혼자 돌아다니거나 밥을 먹는 것을 상상하며 멈칫거리는 것은 내 수준이 상상한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어차피 나는 나를 넘어설 수 없는 사람... 떠나기 전에 난 절대 '자유'로 느낄 수 없는 그 막막함을 감수해야 했었다. 여기서도 어차피 하는 것을 굳이 거기 가서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내겐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넉넉하고 여유롭게 내 상상을 뛰어넘어 보여준 것들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겐 왜 여행을 하는지 왜 여행객을 맞는지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선뜻 산책을 권하고, 같이 먹자고 하고 같이 가자고 하고...
인생 어느 시기에 찾아오는 기회라는 것은 언제 왜 허락되는 걸까.
이유 없이 하루를 챙겨준 정엽님, 수십 잔 무료로 제공받은 사장님의 커피, 코삿의 고급스러운 음식들, 밤마다 고급 장비로 상영된 영화들, 숙소에서 초대받은 식탁들, 여행객에게서 들은 영화 같은 삶의 이야기들, 잘 지켜진 자연의 아름다움, 따뜻한 공감들...
누군가 나에게 여행을 온다면 난 어떤 세상을 제공해야 할까.
치열했던 시간의 구체성으로 누군가의 여행지가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어 다행이다. 마음속에 있던 약간의 억울함이 흐물흐물 풀어져 버렸으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여행지가 되어줄 수 있을까. 다음 여행을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여행지로서의 구체성을 가진 '나'라는 공간이란 생각을 했다. 궁금하고 함께 있고 싶고 바라보고 싶은 무엇가를 가진 '나'를 준비한다면, 어디를 가든 또 다른 멋진 '여행지'를 '만날' 수 있겠지.
나는 너의 '여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