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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Dec 12. 2023

서울의 봄

틀린 답을 적는 용기

이 영화를 본 기록을 하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되도록 생각했던 것을 잡아두고 싶어 기록한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함은 무력감과 분노를 정의감 속에서 느껴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크다. 무엇이 옳은지 알아도 일이 잘못돼 가는 걸 봐야만 할 때 유능한 사람이 무능감에 던져질 때 그 고통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얼마 전에 오랜 책 친구와 온라인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억울함을 느낀 사건들은 사고 같은 거였다고 인생에 사고가 많지 않았던 걸 감사하기로 했다고 말했었다.


이런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난 영화 속의 이태신이 느끼는 감정을 감당하는 게 괴로웠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부풀어 오르고 나쁜 사람들의 자신감에 혐오감이 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바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결론을 알고 있는 답답한 이야기의 순간순간, 방향이 잘못된 유능함의 폭주를 하나하나 감내하는 게 괴로웠다. 10초 건너뛰기를 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이길 수 있었는데 바꿀 수 있었는데 하면서 아쉬운 순간들마다 억울함을 느꼈다. 영화가 중반을 지나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화가 나고 억울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수가 말하는 정답, 무능을 유능으로 탈바꿈시켜주는 선택지로 넘어갔다. 그 모든 순간을 10초 건너뛰기 없이 지켜보면서 나는 차츰 차분해졌다.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저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소수만 억울할 자격이 있었고 난 그 소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부끄러웠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였고 그때 전두광이 없었어도 저런 일이 벌어졌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전두광이 악의 축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라가 그 모양이었고 당시 군인들이 생각하는 반공과 민주주의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는 걸 고발하는 듯했다. 그때 내가 청춘이거나 중년이었다면 그 현장에 있었다면 이태신의 편에 서는 사람이었을까. 700만이란 영화 관객이 그 현장에 가면 사령관을 지키며 쿠데타에 맞서는 소령의 선택을 할까.


전두광만 하나회만 욕하는 건 반쪽짜리 생각이라고 영화 전체가 호통을 치는 듯했고 난 그걸 깨달은 후 마음이 차분해졌다. 속상해서 계속 눈물이 났다.


내가 매주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틀린 답을 말하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이다. 자기 선택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선택하지 않은 옳은 답을 칭찬받고 싶다고 바꾸지 마라." 자기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틀리는 용기를 먼저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틀리면 같이 박수를 쳐주고 용기 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도록 연습시키고 있다.


이태신은 영화 내내 소신 있게 틀린 답을 적고 있었다. 권력에 의해 상황에 의해 자기가 선택한 답은 이미 오답이라고 판가름이 났지만 그걸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도록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그 시대가 말하는 틀린 답을 써내려 갔다. 전두광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에 동조한 모든 사람은 군인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위험한 답.


이태신은 왜 그랬을까. 그 답밖엔 적을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희생을 치른다 해도 이런 사람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순신 동상과의 오버랩 장면은 참 서글프다. 얼마나 변한 게 없는지.


천 명도 아니고 몇 개의 부대도 아니고 겨우 백여 명. 그게 내가 잘 몰랐던 1979년 12.12 사태의 진실이었다. 여전히 봄이 오지 않은 서울에서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부끄럽다.


11월부터 북클럽에서 내년에 읽을 책 때문에 프라하의 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단 한 번의 삶을 사는 것으로는 전생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고 앞으로도 완벽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삶의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 삶 속에서 한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는 생전에 알 수 없기에 우린 절대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없다. 세상이 말하는 정답은 전두광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무섭고 유혹적이다. 전쟁, 독재, 관습과 같은 억압이 우리에게 윤리와 도덕을 저버릴 것을 요구할 때 이태신 같은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다. O라고 써 놓고 X 쪽에 사람이 많으면 X라고 바꿔버리는 이유는 주변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이태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세상이 틀렸다고 정한 답을 바꾸지 않았다.


가족이 모두 불행을 당하고 나라가 개판이 되는 꼴을 봐야 했던 사람에게 공치사로 모욕을 주고 싶지 않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 감정과 생각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같이 틀린 답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주 오래 이 감정을 유지할 생각이다.


난 전두광이나 하나회의 멤버보다 본부를 버린 사람들이 더 밉고 싫다. 최소한 그날 전두광보다 그들이 더 나빴다. 독재와 다름없는 개인적 아량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히 사면한 대통령도 싫다.


그런 답답함, 우리가 다 같이 쓴 못난 역사를 열심히 복습하게 만든 좋은 영화였다. 영화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집중해서 볼 수 없었을 거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


#서울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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