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s 의 독거 에세이 6 ㅡ 독거의 동반자 결핍
2주 전에, 고등학교 때 읽은 루이제 린저가 생각났다. 바로 <생의 한가운데>를 주문해서 읽고 있다. 그녀의 책을 읽고 빠져들었던 기억이 전혀 안 난다. 그저 그녀를 알았다는 기억만 난다. 이후 대학에서 읽어댄 것은 신경숙 이었다. ( 표절로 난 완전한 배신감을 느꼈다.)
<생의 한가운데> 이 책의 슈테판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프라두와 닮았다 지극히 지적이지만 나약하다. 그토록 자의식이 강하면서 한 여자 -여동생-의 보살핌과 감시 속에 살아간다. 그들은 여동생의 희생과 헌신을 거절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것을 답답해한다. 이런 유약한 남자들이 니나에게 에스테파니아에게 몰입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 얼마나 이기적인가.
프라두의 말대로 이 남자들은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소비하려고 한다. 그 태도는 당연히 거절당해 마땅하다. 그러니까 니나와 에스테파니아는 평생 그들을 그리워할지언정 도망갈 수밖에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의 사비나처럼...
그랬더니 그들은 죽어버리네... 삶의 한가운데 있지 못하고... 더더욱 비겁하다.
* 몇 개월간 스트레스가 심했고 몇 번이나 무언가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매번 무력감에 그만두었었다. 결국엔 혀가 망가져 버렸고 모든 음식에서 통증을 느끼게 됐다. 얼음조차 타는 듯이 매웠다... 의사는 내 부교감 신경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그녀는 매우 친절했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와 만났다. 내 고통의 근원을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친구.. 그 친구는 가볍게 잊어버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정화가 안 되는 건 당연한 거라는 말도 했다.
어제 비가 왔다 내가 기다리고 바라는 것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느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뭐든 진지한 것을 쓰게 된 것. 그리고 귀찮아하지 않고 남긴 것. 나에겐 엄청난 변화다. 오늘 병원을 나오면서 혼자 수제비를 사 먹었는데 식당 아주머니는 친절히 내 겉절이 접시만 똑바로 정리해 주셨다. '고기를 안 먹으면 뭘 먹어'하시면서...
웃으며 접시를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겉절이를 먹어보고 싶었다. 한 점 먹어봤다. 안 매웠다. 불같이 타는 느낌도 미칠 듯이 쏘는 통증도 없었다. 난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왔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자꾸만 일어나서 나아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행복해지라는 축복도 아니었다. 나로서 여기 있게 허용 아니 방관이라도 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나에겐 '그 또는 그녀'가 아닌 '나 자신'이 결핍돼 있었다
2015년 6월...
작년에 썼던 일기다. 그랬다. 1년 전의 나는 이 글처럼 사고기 뚝뚝 끊겼고 모든 고통에 열렬히 반응했고 신체적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나약했다. 내 정신과 육체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 나의 주변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었고 난 삶의 의지보단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온 나라가 전염병을 앓고 있었고 병원들은 문을 닫았다. 아주 나중에야 난 내 몸의 병을 찾아냈고 겨울이 되고 수술을 할 때까지 내내 아팠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비밀처럼 은밀히 난 매일 죽음을 갈망했다. 내 인생에 가장 커다란 계획이 많았던 해였다. 모든 계획은 나만 빼고 완전히 증발했다. 나만 빼고 증발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 부러웠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문제를 겪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꽁꽁 묻었던 내 얘기를 하게 됐다. 내 아픔의 체험을 그 친구와 비교하거나 경중을 따지진 않았다. 다만 이제 난 나에게 일어난 일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됐고 그것은 '떨어져 있기만' 하는 것과는 다르기에 정리된 언표가 가능했다.
"난 그때가 가장 힘들었고 매일매일 증발 욕구를 느꼈는데도 이상하게 그때가 가장 살아있는 느낌이 강했다는 생각 들어. 그리고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정하니까 내 진짜 모습이 뭔지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기쁘거나 감사한 일에 가장 민감할 수 있었어. 지금이 더 나은 상황인데도 작년에 더 많이 웃었고 더 많이 행복을 느꼈어. 이상하지..."
정말 그랬다. 가장 생생한 삶을 죽음 가까이에서야 가장 절실히 느꼈다. 나의 메멘토 모리는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대로지만 다른 삶으로... 학습된, 좋은 삶의 조건은 지워버렸다.
삶이 너무 아름다워서 죽음은 삶과 사랑에 빠졌다.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작년 일기 속에 '나 자신'의 결핍이란 말이 나온다. 이제 나는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상상'으로부터 나를 구출했다. '나 자신의 결핍'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기 위에서 나에겐 고통스러운 결핍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핍의 반대편에 늘 충만함에 대한 민감함이 있었다. 결핍보다 무서운 것은 그 충만함에 대한 상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알게 되는 중요한 진리들은 얼마나 뻔한 것들인지... 그래서 인식하기가 더 힘든가 보다. 그리고 당연한 줄 알았던 많은 것들은 거의 검증되지 않은 맹목의 신앙인 경우가 많았다.
공들여 쌓은 경험은 그 무용함을 깨닫기 위한 것이었고 연애의 목적은 결혼이 아니었고 몰입해서 읽었던 책의 내용이 전혀 생각 안 나기도 하고 그것은 나름 의미가 있으며, 맛나게 먹은 요리엔 전혀 영양가가 없기도 하고 어떤 수업은 망치는 것이 목적일 때도 있다. 글쓰기는 작가가 되는 과정이 아닌 나를 아는 과정이고 이별의 결과가 행복일 때도 있다.
발생한 일의 가치는 상황 안에서 읽힌다. 상황이 달라지면
같은 일도 다른 가치로 인식된다.
상황을 읽지 못하면 모든 일은 모호한 당연함으로 굳어진다.
그러니 나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높은 검열의 잣대를 저리 치울 필요가 있다. 내 검열의 잣대는 편협한 내 안에만 갖혀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던 일을 영원히 계속하라고 죽음이 내 삶을 뒤흔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미 없는 두려움의 울타리를 치라고 내가 연고 없는 삶의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레서 나는 오늘, 못할 수 있는 자유. 안 할 수 있는 자유 안에서 내가 허락한 못 쓴 글을 써본다. 칭찬 받지 못 할, 훌륭하지 않은 결과도 용납한다. 할 수 있는 엄격한 검열을 생략해 본다. 그것이 내 삶의 문화로 정착되길 바라며...
북팟캐스트 '오후 세 시의 여우'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http://podbbang.com/ch/11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