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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Apr 04. 2016

술의 세계사 - 두려움과 증오에 중독되다

 글항아리 - 술의 세계사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향정신성 물질을 추구해 왔으며 그것이 종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언급한 책을 읽고 있다.  모든 종교적 행위들은 알코올과 그 역사를 같이 했고 인간이 인간 이상의 것을 꿈꾸고 추구하는데 절대적 역할을 해 왔다. 도취와 파괴 지금이 아닌 것,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대한 막연한 갈망을 실현시켜주는 음료. 술. 술을 시작으로 중독성 강한 다양한 형태의 문화가 인간을 발효시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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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음주는 개인과 공동체에 극심한 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물질(특히 음식)이나 활동(달리기, 춤, 작곡, 섹스), 또는 강력한 사고(종교적 신념) 역시 우리 뇌의 욕구와 기쁨의 중추를 활성화시키고(제9장 참고), 행동을 통제할 수 없게 하며,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술의 세계사 - 알코올은 어떻게 인류 문명을 발효시켰나


모든 예술이 함께 어우러졌던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했고 그것을 살아남게 하는데 특별히 유능한 사람들은 이야기꾼으로서 살다 이야기꾼으로서 영생했다. 술에 취해서 접신된 듯, 꿈음 꾸듯 읊조리던 말들은 노래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글이 되고 극이 되고 영화가 되어가며 끊임없이 자기를 담을 그릇을 갈아치웠다. 술에 취해 나중엔 종교에 취해 그다음엔 음악과 영상과 춤과 다른 어떤 것들에 취해... 이야기꾼들은 그것을 전한다.


육체의 사라짐, 육체의 한계를 슬퍼하던 인간이 죽음에 대해 영생에 대해 고민했고 다양한 이야기가 살아남았다. 개인이 아닌 전체, 인류라는 형태의 집단이 집요하게 선택해온 이야기의 원형은 탄생과 죽음, 부활의 이야기다. 소멸한다는 것의 공포는 극복이라는 희망으로 치환됐고 어떤 이야기가 지겨워지면 그 이야기를 죽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부활시킴으로써 이야기를 지속시켰다. 새로운 세대는 늘 새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류로서의 개인'인 이야기꾼들은 안다. 이것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임을...


어제 나는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작곡했고 누군가가 연주해낸 음악을 누군가가 만들어낸 기계를 통해 들으면서 그것에 도취됐다. 고대의 주술사들이 술에 넣어 마셨다던 버섯이 이런 맛이었을까? 눈동자가 풀리고 가슴이 뛰고 몽롱해지고 내가 아닌 것 같고 공간감이 사라지는, 갑자기 모든 것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 그 자리는 어떤 정신의 영원한 제단이었다. 이제 그  향유의 순간을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많은 제물을 바친다...


파가니니는 악마의 연주자라고 손가락질받았었다. '초월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연마하는 것은 귀찮고 그것을 이룬 것을 보는 것은 못 견디게 괴로웠던, 이야기꾼이 아니어서 영생하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일상적 인간들의 가장 손쉬운, 생존 방법이 그것이었다. 비난에 도취되는 것, 거기에 영원히 중독되는 것...


죽고 부활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예배는 참으로 단호하고 격렬하다.


술을 마시고 초월적 아름다움에 이를지, 중독자의 방탕함에 빠질지는 술이 아닌 인간이 선택할 문제다. 종교가 인간을 천국에 이르게 할지 지옥에 이르게 할지는 누가 정할까.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는 생각은 옳을까.  술이 나쁜 건가. 취하는 것이 나쁜 건가. 아주 오랫동안 종교에 도취된 인간이 있었지만 세상이 천국이 되지 않았듯, 아주 오랫동안 술이 있어 왔지만 모두가 중독자가 되지는 않았다. 난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마실 줄 모른다. 하지만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난 종교 중독자였다. 그것은 매우 비슷한 형태로 인간을 잠식하고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억압한다. 무아의 경지에서 행복을 확신한다. 파가니니의 음악에 악마의 낙인을 찍은 인간들의 손가락은 거룩한 주의 이름이라는 명분이 걸쳐 있었다. 그들은 얼마나 자신들의 신념에 도취돼 있었던가... 그들에게 정말 신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


그들은 낙인 중독자다. 성경에 쓰인 술 취하지 말라는 금언은 '술'이 아닌 '취함'에 대한 경고다.


 난 술을 마셔 봤고 취해도 봤다. 그러나 나의 영혼에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에게 문제가 된 것은 '종교에 대한 중독'이었다. 난 신 앞에 단독자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나를 관리하고 다듬으려 했기 때문에 언제나 나를 그리워하며 고독하게 성장했다. 각성은 종교의 숙취가 사라진 후에야 일어났다. 인간을 통제함으로써 살아남으려고 했던 모든 이야기는 버림받았다. 살아남는 이야기는 인간을 '마취'하지 않고 '설득'한다. 내면의 깊은 울림은 그 이야기의 '중독자'가 아닌 '증인'을 양산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에 중독될 인간은 술에도 중독될 수 있다.


거룩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거나 안 마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종교에 심취한 인간이 행여 술로 인해 죄를 짓고 신을 멀리할까 두려워 싹을 자르겠다는 발상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구현한 '정의로운 범죄'와 흡사하다. 행여 나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언제 악해질지 모르는 현재의 착함을 제거하는 것, 선택과 의지의 가능성은 버리고, 방종과 타락의 가능성만 보는 것, <배트맨 대 슈퍼맨>의 배트맨은 그 두려움의 화신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조차 미리 재단하여 행여 나빠질 지도 모르는 것은 다 죽여라...


기독교도 그래 왔다. 두려움에 휩싸여 울타리 안으로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 급급했다. 특히 한국 개신교는 술 문제에 매우 집착한다. 술을 통제하는 인간을 키워내기보단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율법을 강조한 결과,  술은 그냥 술일뿐인데 방탕의 상징이자 저항의 아이콘이 돼 버렸다. 겨우 술 마신 걸로 '엄청난 타락'을 한 것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다. 또는 '엄청난 저항'을 한 것 같은 느낌도...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술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외면한다고 해서 정말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지혜를 전달하는 이야기꾼들이 영생하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이야기에 목마른 자는 도처에 있다. 술 마시지 말라는 명제와 논리는 죽었다. 그런데 존재한다. 마치 좀비처럼... 그것이 현실이다. 모두 술을 마신다. 종교인도 마시고 신도도 마신. 나처럼 술을 싫어하는 사람 빼고... 종교적 의미를 가졌던 시대를 지나 이제 아무것도 아닌 시대인데 '술의 신성한 힘'을 부활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개신교다. 그들이 술을 너무나 두려워함으로써 술에 '죄책감이나 해방감을 불러일으키는 권능'을 부여했다. 술이 뭐라고... 술의 향정신성 작용을 대신하는 것들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 술은 내 영혼에 아무 짓도 못 한다. 술을 안 마신다고 해서 내가 신성해지진 않는다. 내가 모든 율법을 지킨다 해도 난 나실인이 아니다.



식음료의 역사를 보면 도취와 초월성으로 인간을 현혹하던 술에 대항해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것은 커피였다. 다양한 형태의 '각성제'가 다양한 문화권에 있어왔지만  커피의 강력함을 이기는 음료는 아직 없다. 인류는 커피와 함께 밤을 몰아내고 생각과 말과 정체성과 과학과 기술을 다듬어 왔다. 술의 문화에 '종교'가 있다면 커피의 문화에 '과학'이 있다. 인간은 커피를 사랑함으로써 일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끊임없이 상승시키고 있다. 예전엔 신만이 하던 것을 이젠 인간이 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자 이미지를  업데이트하고 싶어 한다. 술이 그렇듯 향정신성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더 많은 자극을 추구한다. 인간은 도취보다 각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영화 <갓 오브 이집트>와 <배트맨 대 슈퍼맨>에는 신에 대한 열망이 강력하게 그려진다. <갓 오브 이집트>에서는 고대 신화의 신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는 현대의 신. 두 영화에서 그려지는 신은... 거룩하거나 지혜가 높은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기능적'으로 인간보다 우월하다.
술을 마신 인간이 커피를 마신 신을 숭배하는 것 같다.

 

커피를 마신 존재 그러니까 초월적인 힘을 가진  유능한 존재가 신이다. 요즘에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을 극사실주의로 묘사한 영화 말고는 기독교 정신을 깊은 철학적 성찰로 그려낸 영화는 나오지 않고 있다. 개신교가 내부적 성찰을 멈춘 지 오래되어 그렇다. 개신교 문화에서 자란 사람은 다른 차원의 문화를 경험해야만 새로운 성장이 가능하다. (바울을 보라)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이 현실이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그리스도를 현실 속에 부활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SF 히어로물은 끊임없이 Jesus christ super star를 영웅의 모델로 부활시키고 있다. 당연하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구원자'다. 심지어 커피를 마심으로써 작은 죽음-잠-을 극복한 인간이 그 초능력을 발휘하여 정성 들여 만든 그릇이 있는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제 현대인은 다른 신을 원한다. <갓 오브 이집트>의 신처럼 인간을 친구로 동등하게 인정하며 <배트맨 대 슈퍼맨>의 슈퍼맨처럼 아름답고 강력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신을...  이 영화 속의 신들은 초월적이지 않다. 그들은 일상성으로 중무장을 했다. 이제 구원자는 직장 동료이고 친구이도 절름발이거나 장님이다. 창녀와 과부와  세리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처럼... 그렇다면 <갓 오브 이집트>나 <배트맨 대 슈퍼맨>은 기독교 정신을 담아 여호와를 찬양하는 기독교 영화인가?


절대적인 힘을 가졌으나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물 위를 걷고 우는 자의 눈물을 닦으며, 자기 별의  아버지가 있으나 인간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인자 슈퍼맨은 인간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연인과 원더 우먼의 돌봄을 받으며 전장에서 내려진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의 손에 안겨 십자가에서 내려졌던 예수님처럼... 이 영화는 기독교의 예수님을 계승한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다. 아니면 진심으로 계승하고 있든지.


고도의 기능성을 자랑하며 현대 문명의 궁극, 지식의 궁극에 이른 루터, 커피의 인도함을 받아 불철주야 쌓아 올린 과학의 탑 위에서 슈퍼맨을 조롱하는 루터를 거뜬히 물리쳐 버리는 슈퍼맨은 배트맨도 인간도 자기편으로 만들어 포용한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바울이 되듯 경쟁심과 정의감에 넘쳐 슈퍼맨을 핍박하던 배트맨은 이제 슈퍼맨의 사도가 된다. 그리고 슈퍼맨은 장렬히 죽음으로써 하나의 밀알이 되어 다른 초월적 인간들이 그 뜻을 계승하게 하는 촉매제가 된다. 다음 편에서 그가 부활할 것은 자명하다. 그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다.


이것은 기독교를 향한 모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또 분노만 할 것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위한 새 부대를 마련하라는 말은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했는데 교회에 새 부대가 있던가? 아마 또 거룩한 손가락을 들어 악마의 영화라며 비난하지 않을까. 사랑이 아닌 분노에 취해...

 

본인들의 포도주가 땅바닥에 줄줄 새나 가고 있는 것은 본인 탓이다...


살아남는 이야기는 늘 자신을 담을 그릇을 선택했다. 우리 집 포도주가 옆집의 새 부대를 선택할 수도 있다. 솔직히 <사자와 마녀와 옷장>과 <베트멘 대 슈퍼맨>이 다를 게 무엇인가. 판타지로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것이 불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슬란은 되고 슈퍼맨은 안 되나? 사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비난조차 없을지 모른다. 포도주 부대가 이토록 낡았으니 누군들 각성하지 않겠는가.


어제 새벽 1시가 넘어 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면서 기독교라는 낡은 부대의 몰락을 다시 확인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죽으려 하지 않으니 부활은 있을 수 없다. 체제를 구축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거대 조직은 그리스도 정신의 재해석에 실패했다. 박지원이 그렇게 싫어했던 앵무새같이 떠드는 고문체가 어떻게 됐는지를 보라. 함석헌이 말했던 경전 재해석의 중요성. 예수를 살아남게 한 것은 사울이었던 바울의 빛나는 지성이었다.


바울에게는 버릴 만한 과거가 있었다.
기꺼이 버렸다는 것이 인정될 만한 제대로 된 삶


 그럼으로써 버림이 가치 있어지는 삶과 자신에 대한 진지함이 있었다. 지금 교회는 바울 같은 사람을 싫어한다. 논리와 지성은 교만이고 죄악이다. 그들의 잘 벼린 사유는 파가니니의 음악처럼 혐오당하고 뽑힌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씨줄과 날줄은 그렇게 낡아왔다. 이제 죽음과 부활의 종교는 다른 곳에서 피어나고 계승되고 있다. 종교의 역할은 문화가 이어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거기엔 초월성도 일상성도, 도취와 환희와 죽음과 부활도 모두 존재한다. 신을 사랑하는 생각하는 인간들을 교만하다며 내친, 교만한 교회가 자초한 결과다.


나는 신을 사랑한다. 신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에게 빠져있었다. 어느 주일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기쁨과 환희를 노래하며 도취된 예배를 행하는 한가운데 앉아 있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낡은 부대구나...


그냥 똑같은 것을 계승함으로써 이것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안일함... 재생에 대한 성찰이 없는 뜬구름 같은 믿음의 희열...


웃고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난 권태기에 빠진 사람이 지난 사랑을 애도하듯 주룩주룩 울었다. 우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어리석은 연인이었다. 나의 지난 시간의 가치는 버림을 위한 거라는 걸 깨달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고독했고 그제야 신과 내가 단 둘이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각성은 다른 각성으로 대치됐다. 다시 취할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취하지 않았어도 난 이제 자기기만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다.


커피를 마시는 인간이 커피를 마시는 신을 꿈 꾸는 시대 속에서 과학이라는 적으로부터 인간과 지구를 지키기 위해 현대의 이야기꾼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난 신이 커피를 마시든 술을 마시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학습당하고 통제당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신을 사랑할 수 있다.



나에겐 이야기가 술이고 제어하는 기능을 연마 중이다. 나를 취하게 한다면 그것을 버리라는 율법은 거부한다. 난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취하는 것을 금할 거라면 책도 신과의 독대도 금해야 한다. 이전의 거부당한 역사들 그랬듯이... 이 정도의 이야기도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건드린 걸까. 살아남을 이야기인지는 언표 된 후에나 알 수 있으니 일단은 내어놓고 봐야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제 나는 섣부른 고백도 섣부른 회개도 하지 않는다.


카렌 암스트롱이 그랬듯 팔로마(고슴도치의 우아함에 나오는 소녀)가 그랬듯... 찢기지 않으려면 도 발 디딜 작은 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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