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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Apr 29. 2016

순간, 영원 속의 순간...

  Aprilis 독서일기 2 ㅡ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부 15장


이 책을 번 정도 읽었다. 아직 다 정리되진 않았다. 나도 토마시처럼 그냥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금은 여...기까지 다음은 저기까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 나는 삶의 모든 순간이 완성된 그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칠판 수업을 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뭘 설명하는 상황에 노출돼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끊임없이 설명해 왔다. 그러다가 나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다르고 내 생각의 과정이 타인의 생각의 과정과 다른 경로를 거친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 시간 지켜봐야 하는 대상이 많을 밖에 없는 삶을 살다 보면, 사람을 과정으로 보게 된다. 결과로 가는 중인 어떤 존재...


이 책을 읽으며 정작 나는 나를 완성된 그림이어야 한다는 억압에 가두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제자들 내 연인들 내 친구들 내 선배와 후배들이 보는 나와 내가 나이길 바라는 나는 어느 정도 모순됐다. 내 말과 내 지식이 나의 영혼과 분리를 일이 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의 경계를 느낄 때가 그때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추락 욕구의 테레자였고 동정의 토마시였으며 동경의 프란츠이자 배신의 사비나였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 모두 다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두렵게 했다고도 썼다. 자신과 비슷한 어떤 단점을 가진 사람을 보면 미친 듯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이 소설을 썼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 안에서 태어난 그들이 자신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정작 자신은 한결같이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 바로 그 경계선을 그들이 뛰어넘기를 바라며 그곳에서는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 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 중간에 튀어나와 짚고 넘어감으로써 그는 '작가란 자기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는 통념을 즈려밟는다. 이 인물들은 조작되지 않았고 살아 움직이며 그들 스스로 붕괴와 재을 반복하면서 각자가 정한 '영원 회기'에 자신을 못 박고 있다. 이 무거운 삶은 '초극'을 통해서만 가벼워질 수 있다.


그는 그래서 반복하고 다시 보고 다른 사람이 보고 또 내가 읽게 하면서 말한다. 삶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의도는 왜곡되며 각자가 원하는 대로 재해석된다. 그러니 내가 그린 그림은 결코 완성된 그림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결정적인 평가 받을 수 없. 나에 대한 모든 말은 각자의 견해일 뿐이다.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다. 존재는 정의되기 힘든 '무거움'으로 탐색돼야 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탐사'라는 것이다. 작가가 튀어나와 편집자적 논평을 함으로써 소설이라는 형식조차 초극되어야 함을 말하는 그의 필력이 경이롭다.


결국 몇 번을 반복해 읽음으로써 나는 토마시와 테레자와 프란츠와 사비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들 모두가 있으며 그들이 내가 살아 보지 않은 삶을 살아 줬음을 인정할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추락함으로써 사랑을 깨달은 테레자그래서 '이제' 이해가 된다. 그녀는 '이제' 토마시를 작은 토끼로 인식할 수 있다. 동경의 아이콘이 언제 떠지 모를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가 자기 파괴의 이유가 되었다가 회피했다가 미워했다가 다시 붙잡았다가 결국 돌보아야 할 작은 토끼로 되는 과정을 기꺼이 감당한 그녀에게 경의를 표한다.


타인이 뭐라 하든 그들은 용감하다.


추락이든 연민이든 동경이든 도망이든 그들은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바라보기만 하던 벽'을 넘어선 것이다. 깨달음과 반성의 습관에 중독된 철학자보다도 부딪쳐 살아낸 그들이 더 낫다. 지금 이 순간이 나를 영원속에 가둔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과연 벽 앞에서 고민만 하고 있는 것이 옳을까 사랑인 줄 알았지만 그냥 크는 과정에 불과했던 많은 '순간들'이 생각난다. 끝인 줄 알았지만 시작조차 아니었던 많은 절망들이 생각난다. 과정이 있을지언정 끝은 없다. 이 손, 이 눈도 영원히 죽진 못한다. 내가 나를 떠나면 또다른 무언가로 살아갈 것이다. 죽음도 끝이 아닌 이유로 순간순간은 소중하고 순간은 이어짐속에서야 비로소 순간의 자격을 획득한다. 내 과정은 나아감으로써 무거워진다. 가벼움은, 참을 수가 없다.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014년 4월~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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